제목 | 부흥이 시작되는 자리 | 날짜 | 2024년 7월 19일 |
본문 | 느헤미야 8장 1-12절 | 비고 | 금요기도회 설교 |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난 5일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우리는 오늘 말씀 붙들고 기도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세워진 설교자를 통해 말씀을 들으시고, 그 말씀을 붙들고 다 함께
뜨겁게 기도하는 귀하고 복된 은혜의 시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교회는 현재 아주 중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몇 가지가 있겠지만 2가지 정도만 잠시 나눠볼까요?
첫째, 영아부 아기학교가 끝남과 동시에 여름성경학교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의 다음세대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집중해야 하는 여름사역이 현재 진행되고 있지요
교회 마당 입구에도 현수막이 걸려있고, 본당 올라오는 벽면에, 그리고 여러분들이 보실 때
왼쪽 편에서 여름 사역에 대한 현수막이 붙어져 있습니다.
성경학교와 수련회는 너무 중요하지요. 교역자들과 교사들은 어떻게든 아이들에게 말씀을,
진리를 전하려고 고군분투 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을 보시니 교회가 막 역동성있고
살아있는 것 같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두 번째는 교회 리모델링이지요. 올해 우리는 리모델링을 놓고 개개인이 금식기도하며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난 70년간 잘 달려왔는데 이제 한층 더 성장되고 발전하기 위해
준비하는 단계지요.
이렇게 우리는 리모델링을 준비하고 있으며, 여름사역을 열심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한번 생각해봅시다.
이런 사역들을 통해서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바라고 꿈꾸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흥이지요.
많은 분들이 대표기도하시는 것을 보면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많이들 기도를 하십니다.
그리고 강단에 선 설교자가 “여러분들 부흥을 원하시지요?”라고 말하면
모두가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이렇게 누구나가 원하고 바라는 것이 부흥입니다. 그렇다면 부흥은 무엇일까요?
혹시 진지하게 생각해보신분 계십니까?
보통 부흥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벌떼처럼 많이 모여있는 것을 부흥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부흥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한다고 하더라도,
그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가짜 예배자들이 많다면 그것은 부흥이 아닙니다.
그저 숫자만 많아진 것이지요.
부흥은 무엇일까요? 성경밖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경건한 우리 믿음의 선배들,
영국의 청교도들은 부흥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회심의 역사, 거듭남의 역사가 개개인과 공동체에서 왕성하게 일어날때가
부흥이라고 말입니다.
회심은 말씀을 통해 회개와 믿음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죄악과 문제들을 깨닫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나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전의 삶은 청산하고 거룩한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굳건한 믿음으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우리 교회가 부흥되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우리는 그 말씀대로 뜨겁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더불어 이 자리에 앉아있는 여러분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다음세대들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교회가 성경적인 부흥,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부흥이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회심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둘씩 모여서 영광의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할 때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부흥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불금, 불타는 금요일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들이 너무 귀합니다.
세상은 쾌락과 즐김으로 불탄다면, 우리는 오늘 이 밤 말씀과 성령으로 불태우길 축복합니다.
오늘은 여러분들과 함께 느헤미야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제가 조금전에 부흥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는 성경이 말하는 부흥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느헤미야를 이야기할때면 성벽재건만을 이야기할때가 많습니다.
맞습니다. 느헤미야는 홀로 이방땅에서 잘먹고 잘 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왕의 술맡은 관원장이기 때문이지요. 술맡은 관원장은 왕의 신뢰를 받는 자리입니다.
예를 들어 술에 독을 타서 왕을 암살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왕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아무에게나 쉽게 그 자리를 내어주지 않아요. 유식하며 왕에게 신임을 받는 최고급 관리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여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느헤미야가 세상에서의 지위, 수산성에서의 안락함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1장을 보니 그의 동생으로부터 소식을 듣습니다. 예루살렘이 현재 형편없니 방치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기위해 1200킬로나 되는 먼거리를 여행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현재 예루살렘은 무너져있습니다.
외적으로 무너져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무너져있습니다.
1차 스룹바벨의 귀환이후 성전은 재건했지만 성벽은 재건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약 100년가량 방치되어 있었지요.
성벽이 없으니 이웃 나라들에게 공격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 즉 구별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희미해질 때 느헤미야의 귀환으로 성벽을 52일만에 재건한것입니다. 너무 영광스럽지요.
백성들이 한손에는 무기를 한손에는 도구를 잡고 일했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를 비롯한
방해세력들이 있지만 어려움을 극복하고 끝내 성벽을 재건합니다.
그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느헤미야 6장 12절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주위 나라들이 두려워하고 낙담합니다.
하나님과 백성들이 이 일을 완공했기에 세상이 두려워떱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느헤미야를 생각할 때 딱 떠오르는 것이 성벽재건입니다.
하지만 느헤미야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벽재건이 아닙니다.
이미 구약파노라마 강의를 들으신분들은 배우셨습니다만
1장부터 7장까지는 성벽을 다시 세우는 이야기이고
8장부터 13장까지는 성벽이 아닌 백성들을 다시 세우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느헤미야가 성벽을 다시 세운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앞서 제가 구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구별입니다. 백성들은 거룩하기 위해서 구별합니다.
구별하다는 히브리어 단어가 카도쉬입니다. 이것은 자르다, 분리하다는 의미입니다.
즉 성벽을 재건하고 이방 나라들과 구별되기 시작합니다. 왜냐면 이미 스룹바벨과 함께
성전은 재건했지만 그들은 구별되지 못하고
이방인들과 혼인하며 동화되어 버렸기 때문이지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의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라는 분명한 선언뒤에 있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우리는 먼저 부흥을 꿈꾸기 이전에 이런 영적인 성벽을 쌓아야 될 줄 믿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각 개개인의 영적인 성벽입니다.
여러분들 스스로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내가 쌓아야 할 성벽은 무엇입니까?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분리하고 끊어버려야 할
세상의 것들은 무엇입니까? 잘라버려야 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했던 나의 마음들,
내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이 놓여있다면 그것을 잘라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과 기도로 은혜로 믿음의 성벽을 재건해야 합니다.
이런 영적인 성벽을 먼저 쌓아야 그 안에 중요한 내용들을 채울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교회는 여름 사역의 한 가운데 있습니다.
다음세대의 여름사역이 바로 이런것이지요. 올해는 어떤 프로그램으로 아이들을 기쁘게 할까? 어떤 것으로 아이들을 재미있게 할까? 어떤 밥과 간식을 줘서 아이들을 기분좋게 할까?
물론 이런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이것이 아닙니다.
여름 사역의 핵심은 오직 말씀과 기도입니다.
성경학교와 수련회 기간에 모두가 초 집중하여
이런 믿음의 성벽을 쌓고, 그 안에 영적 대 각성운동이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때로는 기도를 통해 이뤄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하길 하나님 말씀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할 때 이런 폭발적인 역사가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함께 1절을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1절을 살펴보니 굉장히 의미심장합니다. 느헤미야나 에스라가 먼저 백성들을 소집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을 보십시오. 마지막 단어가 무엇입니까? “청하매” 백성들이 먼저 요청했습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주십시오. 우리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알려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백성들도 알고 있습니다. 이들은 지금 심각한 영적 메마름에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한 그 생활이 지속되어 영적으로 점점 메말라 가고 있지요.
그러니 이들은 지금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갈급함으로 에스라에게 간절히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2절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말씀을 알아들을만한 모든 사람들이 에스라 앞에 모입니다. 모여서 딴거 하는거 아닙니다.
우리가 이런 프로그램하자. 저런 프로그램하자 아닙니다. 그저 말씀을 듣기 위해 모입니다.
3절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놀랍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그 모인 모든 사람들이 새벽부터 정오까지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5-6시간동안 말씀에 집중한 것이지요.
오늘날로 따지면 말씀 사경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5절을 보니 특이합니다.
5절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모인 모든 백성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씀을 듣습니다. 읽지는 않겠지만 6절을 보니 백성들은 손을 들고 아멘으로 화답하기도 하고 몸을 굽혀 땅에 대고 경배합니다.
몇시간 동안요? 6시간동안 일어서서 쉴틈없이 하나님 말씀을 듣는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소중하고 감사해서, 그저 앉아서 받을 수 없기에
이들은 서서 말씀을 받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에 나오는 백성들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십시오.
새벽부터 나와 일어나서 몇시간 동안 말씀을 듣습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모였습니다.
지금 이들은 우리가 그저 매 주일 혹은 금요일마다 와서 예배드리는것처럼 습관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영적인 상태를 진단했고, 그에 따라 답을 내렸죠.
나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 우리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말씀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라를 초대해서 말씀을 듣는것입니다. 온전히 말씀에 집중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가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가장 먼저 말씀을 사모하는 교회가 되길 축복합니다.
여러분들 개개인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만큼 말씀을 사랑하는 성도가 되길 축복합니다.
이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단상 위에서 세상의 소리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퍼집니다.
설교자를 통해 말씀이 들리기 시작할 때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으며 겸비하며
들어야 합니다.
오늘 내게 이 말씀이 아니면 안되겠다. 주님 내게 말씀하여 주옵소서!라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1907년 평양 대 부흥 사건을 기억합니다. 한국 교회사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을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 제일 처음에 기록될 사건입니다.
이 운동은 다름 아닌 사경회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말씀이 꿈틀거리기 시작할 때
부흥이 시작된 것이지요.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사경회가 시작되자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실제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이런 사경회게 참석하기 위해 짐을 싸들고 보름정도 걸어서
먼거리를 왔습니다.
지게로 짊어지고, 등에 메고, 어깨에 메고, 심지어는 아이들도 데리고 왔지요.
왜 찾아왔을까요?
왜 그 먼거리, 부산에서 목포에서 전국 각지에서 평양으로 모여 들었습니까?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오늘 내게 우리 가정에 어떤 말씀을 전해주실지 깨닫고 싶고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설교자가 설교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올 때 사람들이 달려가
그들의 다리를 꼭 붙잡고 애원했다고 합니다.
제발! 제발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을 더 전해주십시오. 우리는 말씀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몇 날 며칠을 말씀을 듣기 위해서 이곳에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 없습니다.
말씀을 더 전해주십시요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선교사님들과 설교자들은 다시 강단으로 올라가 말씀을 선포했지요.
그때부터 시작된 말씀, 말씀이 선포되자 곧 회개의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선교사님들과 설교자들이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시작된 회개의 운동은 점점 번져갔고
여기서부터 움직이기 시작한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들과 이 나라를 살렸습니다.
말씀운동이 곳곳으로 퍼졌고, 그것이 곧 기도 운동으로 변했고,
곧 전도 운동으로 변했으며 이것이 이후 이 나라에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평양을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차마 흑암 가운데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실 수 없어
불같은 설교자들을 세워주셨고 이들을 통해 백성들이 소생케 되었습니다.
곳곳에서 말씀이 선포되어지기 시작할 때 마른 영혼들이 회복되며,
마른 뼈들이 살아나고 교회와 성도들, 각 나라들을 살리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거룩한 백성들,
각 개개인이 회심할 때 교회 공동체 가운데 부흥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부흥이 일어나는 때는 곧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어지고 회심이 일어나는 때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부흥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날마다 단위에 세워질 설교자들을 위해 기도하셔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이 깨달아지고 은혜를 받는 것은 세우신 설교자들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니 어찌 설교자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날마다 설교자를 위해 기도하시길 축복합니다.
이렇게 에스라가 단위에서 율법을 낭독합니다.
그런데 그는 혼자서 사역했던 것이 아닙니다.
7-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7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은 백성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 그들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였는데
8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지금 본문에 13명의 이름과 레위인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또 다른 말씀의 나팔수입니다.
이들은 백성들이 서서 율법을 듣는 동안 사람들에게 율법을 깨닫고 하고
바르게 해석해줍니다.
이 사람들은 말씀을 사모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말씀 연구를 했던 사람들로 보입니다.
만약 이 위대한 에스라의 사역 가운데 이들이 없었다면
백성들은 새벽부터 정오까지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교회에 부임하고 줄곧 들었던 이야기가 예전에는 우리 교회에 말씀 교사들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각 부서별로 말씀 맡은 교사들이 있었고,
때로는 그 말씀 교사가 오후예배때 설교를 하기도 했다면서요? 그렇죠?
바로 오늘 7절에 나오는 이들이 그런 역할을 한 것입니다.
에스라가 단 위에서 율법을 낭독하면 백성들 사이사이에 서서 사람들에게
그 뜻을 제대로 해석해줍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말씀의 스피커가 된 것이지요.
이것은 마치 말씀 교사들이 다른 성도들과 아이들에게 말씀을 전한 것 같이요.
이들은 왜 힘을 다해 율법을 해석하고 그들을 깨닫게 했을까요?
저는 다시금 확신합니다.
느헤미야와 에스라 그리고 이 레위인들은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바로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만이 정체성 혼란 가운데 있는 백성들을 살리고
그들을 회복할 수 있다는 확신 말입니다.
죽어가는 영을 깨우는, 아니 이미 죽어버린 영을 다시 깨우는 사역,
하나님의 말씀이 백성들 가운데 심겨지고 싹이 나고 뿌리를 내려 열매를 맺는다는
그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가요?
백성들은 이미 오래전 스룹바벨과 성전을 재건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식어버렸습니다.
가시적으로 보여지는 하나님의 성전은 재건했고 제사가 살아났을지 모르겠지만
보이지 않는 그들의 마음, 영혼은 이미 무너져 내려있던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와 에스라와 말씀 맡은 자들이 그토록 헌신하며 희생했던 것이지요.
백성들은 그동안 알게 모르게 갈급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요?
갈급한 마음을 가지고 모여있는 백성들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십시오.
마치 가물어 메말라 버린 논에 물이 부어지기 시작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 논은 물을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지금 백성들의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렇게 외쳤지요
아모스 8장 11절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아마도 그동안 백성들의 상태가 이와 같았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교회가 다른 것이 아닌 말씀으로 회복되며 부흥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교회의 몇몇 사람들만 말씀에 능통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들이
이와 같은 말씀의 사람이 되길 축복합니다.
우리 각 개개인이 먼저 말씀으로 변화되면 어떻게 될까요?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불이 합해져서 점점 더 커지고 시간이 지나서는
그 말씀이 우리 교회를 완전히 불태우게 될 줄 믿습니다.
그때가 비로소 우리 교회가 성령이 불타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이 선포되고, 말씀이 해석되기 시작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그들에게 말씀이 들려지니 울기 시작합니다.
수문 앞 광장에 모여 말씀을 듣던 모든 백성들이 웁니다.
여기서 울다는 단어의 원어는 통곡입니다. 백성들은 말씀이 들릴 때
그냥 눈물을 주르르 흘렸던 것이 아니라 그들은 통했습니다.
꺼이꺼이 우는 것, 성령의 역사로 인해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이 터지며
그들은 회개의 자리로 나가지 않았겠습니까?
백성들은 말씀이라는 거울 앞에 자신을 비춰보며 자신을 똑바로 바라봤습니다.
자신들과 자신들의 조상들의 죄가 무엇인지, 내가 얼마나 비참한 존재이고
하나님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살았는지등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을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들려지기 시작할 때,
말씀의 역사가 시작될 때 이런 역사가 일어납니다.
설교자가 아무리 아멘을 강조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설교자가 아무리 듣기 좋은 말을 해도 이런 일을 일어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만이 살아움직이며
우리의 심령을 찔러 쪼개기 시작할 때 이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여러분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백성들이 율법책 가져 오기를 요구하고 듣고 엎드리기 시작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 깨달아지십니까?
여러분들이 이렇게 깨닫는 것은 제가 설교를 잘해서일까요?
어쨌든 열정적으로 전하려고 하니 여러분들에게 깨달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여러분 아니예요 착각하시면 안됩니다.
지금 여러분 앞에 서 있는 제가,
설교자가 설교를 잘해서 여러분들이 깨달아 지는게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여시기 때문에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아주 오래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되었던 말씀이
오늘 이 시간 나의 말씀이 되게 하시는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꿈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 우리의 다음세대들이
성경이 말하는 부흥을 경험하고픈 꿈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꿈을 꾸지 않습니까?
성경학교가 진행중에 있고, 교회 리모델링도 곧 시작합니다.
교회의 참된 부흥은 무엇으로부터 시작이 됩니까?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사랑하는 거룩한 주의 백성들이 모여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모여 있고, 모인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고 온전하게 선포되고
그 말씀이 깨달아지기 시작할 때 비로소 기도가 터져 나오고 부흥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설교 서두에 진정한 부흥은 무엇입니까? 정의가 무엇입니까?라고 말씀을 드렸지요
혹시 기억이 나십니까?
진정으로 회심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둘씩 모여서 영광의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할 때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부흥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오늘 이 자리, 비가 오는 궂은 날씨지만
찬양과 말씀, 기도를 사모하며 이 자리에 모인 우리로부터 부흥이 시작되길 축복합니다.
에스라가 율법을 낭독하고 깨닫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엎드렸습니다.
오늘 이 자리가 우리가 엎드려 기도해야 되는 자리인줄 믿습니다.
9장을 보면 백성들은 본격적으로 스스로 자복합니다. 스스로 죄를 깨닫고 엎드립니다.
그때 비로소 부흥이 시작되었지요.
어디서부터 시작입니까?
수문 앞 광장, 에스라가 율법을 선포했던 그 자리가 곧 부흥이 시작되는 자리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오늘뿐 아니라 앞으로 우리 교회에 있을 모든 예배 시간, 금요기도회 시간들이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부흥이 시작되는 자리가 되길 축복합니다.
그리고 이후에 본문을 보니 백성들은 슬픔 대신 감사와 기쁨으로 나아갑니다.
여호와로 인해 기뻐한다는 것이지요.
말씀을 통해 회개하고 삶이 변화된 사람과 교회는 이처럼 슬픔에서 기쁨으로 변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 하나님과 함께 하는 교회는 날마다 이런 것을 경험합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편 30편 11절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오늘 밤 우리가 함께 말씀을 붙들고 찬양하고 기도할 때
우리 가운데 이런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말씀을 통해 내 것이 깨어지고, 회복되며, 슬픔대신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런 믿음과 마음으로 더욱 우리 주님께 부르짖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함께 부흥 찬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