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진토에서 시작되는 회복 | 날짜 | 2025년 9월 10일 |
| 본문 | 시편 119편 25절 | 비고 | 수요예배설교 |
[ 서론 ]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의 생기를 잃어버린 적 있으신가요?
기도는 하지만 아무런 감동이 없고,
말씀을 읽어도 한 줄 마음에 와닿지 않고,
예배는 드리지만 형식만 남은 것 같던 그런 순간 말입니다.
한 성도님이 그런 마음으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저를 살려주세요. 기도도, 말씀도, 예배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경험, 사실 우리 모두에게 있지 않습니까?
본문의 시편 기자도 똑같은 고백을 합니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생케 하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회복의 출발점과 본질,
그리고 그 말씀이신 예수님을 함께 바라보려 합니다.
회복은 말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다면, 시편 기자는 어떤 상황 속에서 이런 간절한 고백을 드린 것일까요?
이제 우리는 시편 119편이 어떤 배경 속에서 쓰였는지,
그리고 25절의 고백이 담고 있는 깊은 신앙의 절규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 본론 1 ]
시편 119편은 성경에서 가장 긴 시편입니다.
그러나 이 시는 단순히 길어서 주목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는 무너진 시대 속에서 하나님 말씀에 다시 서고자 했던 사람의
매우 절박한 믿음의 고백이 담겨 있기 때문이죠.
저자·시기는 불확실하지만, 포로 귀환 이후의 ‘말씀 재건’ 시기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신앙의 기반이 사라졌던 시대,
그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만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는 확신을 고백합니다.
말씀, 법도, 계명, 규례, 증거 등 다양한 표현을 통해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삶의 모든 소망을 두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죠
시인이 고백합니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생케 하소서.”
여러분, 여기서 ‘진토’는 히브리어로 ‘아파르’(עָפָר)입니다.
이것은 그냥 흙이나 먼지를 뜻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이 단어는 성경 곳곳에 등장합니다만
대표적으로 창세기 2장 7절과 3장 19절을 살펴볼까요?
창 2:7 –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아파르)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
창 3:19 – “너는 흙(아파르)이니 흙(아파르)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은 인간 존재의 시작과 끝이
모두 진토 위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어 주시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전적으로 하나님 의존적이며 연약한 흙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은 지금, 자신의 영혼이 생기 없는 먼지와 같고,
하나님의 생명이 없이는 일어설 수 없는 바닥에 붙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달고 할 때
‘붙었다’이건 단순히 바닥의 상태를 말하는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길을 걷다 보면, 바닥에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껌을 보신 적 있으시죠?
시인의 고백은 마치 그런 상태입니다.
스스로는 떨어질 수 없는,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 자리.
지금 그는, 그처럼 무기력한 심령의 상태를 바르고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 지금 제 영혼이 흙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감정도 식었고, 기도도 메말랐고, 말씀도 머리로만 맴돌 뿐입니다.
제 힘으로는 못 일어납니다. 주님 도와주옵소서”
그리고 시인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아래놓습니다.
“내가 나의 행위를 아뢰매…” (26절)
회복은 이와 같은 바르고 정직한 고백에서 시작됩니다.
시인은 삶의 방향, 지나온 길, 감추고 싶은 치부까지도 주님께 드러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한 회복은 하나님께 우리의 삶의 방향을 다시 여쭈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말씀 앞에 우리의 길을 고백하고,
그 길을 다시 주님께 인도받고자 할 때,
비로소 회복의 첫 걸음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제 시인은 ‘거짓의 길’을 끊어내고, ‘진리의 길’을 택합니다.
29절과 30절을 눈으로 보십시오.
“거짓의 길을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내가 진리의 길을 택하였나이다.”
여기서 말하는 ‘거짓’은 단순한 거짓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도 괜찮다고 여기는 교만,
말씀 없이도 버티려는 독단, 자기 확신과 위로로 땜질하는 영적 무감각등
사탄이 끊임없이 꾀는 것들 그 모든 것이 거짓입니다.
그런데 말씀 앞에 서면,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리인지가 분명해집니다. 그렇죠?
그리고 시인의 고백은 이제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31 내가 주의 증거들에 매달렸사오니 여호와여 내가 수치를 당하지 말게 하소서
여기서 ‘증거’란, 시편 119편 전체 문맥에서 볼 때 하나님의 말씀,
그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언약 속에서 계시하신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렇게 시인의 진토에 붙어 있던 영혼이,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린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 무엇인가에 붙들려 살아갑니다.
쌓여가는 걱정, 자녀 문제, 건강의 불안함, 사람들 앞에서의 체면, 끝없는 책임감...
이런 것들이 우리 마음을 짓누르고,
때로는 기도를 멈추게 하고, 말씀조차 멀게 느껴지게 만듭니다.
그렇게 붙들린 마음은, 점점 하나님께 무뎌지고,
결국은 지치고 무너지는 자리로 향하게 되죠.
그러나 말씀에 붙들리면 다릅니다.
현실이 당장 달라지지 않아도,
상황을 바라보는 눈이 바뀌고, 짐의 무게가 달라지고,
멈춰 있던 발걸음이 다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 말씀이 우리를 다시 살려내는 힘이 됩니다.
그리고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32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
껌처럼 바닥에 들러붙어 있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달라진 건 환경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말씀으로 메마른 심령이 다시 숨을 쉬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다시 믿음의 길 위에 세우는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합니다.
시인이 그렇게 목숨처럼 붙든 그 ‘말씀’,
그 말씀은 어떻게 실제로 우리를 소생시키는 걸까요?
그 놀라운 답을, 이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 본론 2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앞서 진토에 붙어 있던 영혼이 정직한 고백으로 시작하여,
길을 하나님께 아래놓고, 거짓을 끊고 진리를 택하며,
말씀에 붙들린 사람으로 변화되는 여정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시인이 그토록 간절히 매달렸던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생케 하소서”라는 기도는,
어떻게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걸까요?
먼저, “말씀대로”라는 것은 “내 감정대로”, “내 계획대로”가 아니라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를 뜻합니다.
회복의 근거를 자신의 자격이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 곧 약속의 신실함에 두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리고 “소생”도 중요합니다.
히브리어로 ‘하야’(חָיָה),
하나님께서 꺼진 심령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철저한 회복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말씀으로 그렇게 일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한 마디 말씀에 빛이 생기고,
혼돈과 공허, 어둠의 깊음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빛과 생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은 우리의 존재를 살리는 양식이며, 삶을 인도하는 빛이며, 영혼의 호흡입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의 창조부터 오늘까지 이어지는 회복의 방식인것이죠.
그리고 그 ‘말씀’은 신약에 와서 한 인격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 1:14)
하나님은 그분의 약속을 단지 글자에 머무르게 하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로 성취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은 진토보다 더 낮은 무덤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거기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그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지금도 말씀으로 우리를 다시 일으키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붙어 있던 그 바닥 끝까지 내려오셨습니다.
우리의 죄와 수치, 절망을 짊어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한 바닥을 통과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바닥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그분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소생’의 실체를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시인이 갈망한 회복,
'소생'의 진정한 실체는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소생은 단순한 위로나 감정 회복이 아닙니다.
우리 존재 자체가 완전히 바뀌는, 영적 전환의 사건입니다.
죽음의 권세 아래 있던 자가 생명의 권세 아래로 옮겨지는 바로 이것,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고, 우리의 진정한 회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지금도 여전히 말씀과 성령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그렇습니다.
기록된 말씀은 우리의 길을 비추고,
그 말씀 되신 예수님은 성령으로 우리의 심령을 일으키십니다.
말씀 한 구절이 마음 깊은 곳에 비춰질 때,
회개의 기도 위에 말씀이 떨어질 때,
성령의 숨결이 우리의 내면에 살며시 닿을 때,
메마른 영혼이 다시 숨을 쉽니다.
현실이 곧바로 바뀌지 않아도 시선과 발걸음이 달라집니다.
이것이 바로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생케 하소서”라는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지금, 이 순간의 응답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결국 바뀌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붙들림’입니다.
예전에는 진토에 붙어 있었지만,
이제는 말씀이신 주님께 붙들린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
부활하신 주께 붙들린 사람은 달라집니다.
같은 자리에 있어도, 속도가 바뀌고 방향이 달라집니다.
가장 밑바닥에서 간신히 버티던 사람이,
이제는 주님의 말씀 따라 다시 달려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회복은 거창한 무언가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저 그 자리에서, 바닥에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주여, 주님의 말씀대로 나를 일으켜 주옵소서.”
오늘 이 고백이 여러분의 입술과 심령에서 진심으로 흘러나오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붙들려,
다시 일어나 달려가는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있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결론 ]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얼마나 깊은 바닥에 깔려 있든지,
하나님 앞에서는 회복의 문이 여전히 열려 있다고 말입니다.
그 문은 거창한 각오가 아니라 이 고백에서 시작됩니다.
“주여, 말씀대로 나를 일으켜 주옵소서.”
그 고백을 들으시는 하나님은
창조 때처럼, 부활의 아침처럼,
오늘도 말씀으로 우리를 다시 일으키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에서, 그 약속의 말씀에서,
그리고 진토보다 더 낮은 무덤까지 내려가셨다가
다시 일어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오는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그분의 말씀은 살아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고,
멈춰 있던 발걸음을 다시 달리게 하기를 축복합니다.
말씀대로, 복음대로, 주께서 여러분을 반드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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