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론 ]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흔들리는 삶이 아니라 안정적이고 고정된 삶을 살아가려 합니다. 그래서 젊을 때는 ‘가능성’을, 장년때는 ‘안정과 책임’을, 노년에는 ‘평안’을 구합니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죠. 직장, 자녀손들의 미래, 건강의 문제등
그 어느것 하나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사람들은 늘 불안함에 휩싸여 살아가곤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어려울때면 쉽게 낙심합니다.
하지만 그럴때마다 우리에게 진짜 힘이 되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
영원한 반석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죠.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는 유다의 멸망이 임박한 때, 오히려 ‘견고한 성읍’을 노래합니다.
현실은 무너지는데, 그는 찬송을 외칩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역설 아닐까요?
눈앞의 현실은 폐허인데, 입술에서는 찬송이 흘러나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왜 이렇게 행동을 할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본문을 붙들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삶이 흔들릴수록 우리는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가?
고난의 시기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오늘 말씀을 통해 함께 살펴보고,
영원한 반석되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본론 1]
함께 읽은 이사야 26장은 ‘그날의 노래’로 시작합니다.
1절 서두에 있는 그 날은 회복의 날이자, 곧 심판의 날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위해서 일하시는 날이자 동시에 교만한 나라들이 완전히 무너지는 날입니다.
이사야는 지금 무너지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미래에 있을 회복의 노래를 미리 부르고 있습니다.
절망의 현실 가운데서 소망을 품고 노래하는 것,
마치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찬양과 기도를 한것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은 내게 닥친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미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지금 선지자의 육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폐허입니다.
하지만 그가 영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실 ‘견고한 성읍’입니다.
1절에 나오는 견고한 성읍을 히브리어로 직역하면, ‘힘의 도시’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께서 친히 힘이 되시는 도시를 의미하죠.
백성들이 세운 성전과 성벽들, 인간의 힘으로 세워진 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성벽이 되어주시는 진짜 성읍, 견고한 성읍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라고 고백하는것입니다.
내 삶이 무너지는 듯해도, 하나님께서 둘러싸주신다는 확실한 믿음,
바로 이것이 진짜 신앙의 시작점이 아니겠습니까?
서두에 말씀드린것처럼 우리는 종종 눈으로 보이는것에서 안정을 찾습니다.
직장, 재정의 문제, 자녀의 성공, 건강등 이런것들이 나의 견고한 성읍이 되어 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친히 성벽이 되어 주신다—이보다 더 안전한 보호가 있을까요?
여기서 질문이 생기죠? “그렇다면 누가 이 성 안에 들어갈 수 있는가?”
2절은 이렇게 말하죠.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할지어다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는 단순하게 의리를 지키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선 나라, 믿음으로 서 있는 공동체를 뜻하죠.
여기서 '신실한 자'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에무님’(אֱמוּנִים, emunim)입니다.
이 단어는 ‘믿음’이라는 단어인 ‘에무나’(אֱמוּנָה, emunah)에서 파생된 복수형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의 뿌리는 동사 ‘아만’(אָמַן, aman), 즉 ‘확고하게 붙잡다’, ‘믿고 의지하다’, ‘신뢰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주 말하는 아멘이라는 단어도 여기에서 유래 되었습니다.
이 단어가 말하는 ‘신실함’은 단순히 믿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넘어,
하나님을 신뢰하고 충성을 지키는 사람,
즉, 고난 중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께 마음을 고정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여시는 이 견고한 성은, 도덕적으로 흠 없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신실함을 끝까지 지키는 자에게 열리는 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
이사야 당시, 이 메시지는 그들에게 더욱 절실하게 들렸습니다.
외세의 침략과 내부의 타락으로 나라가 무너져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백성들은 의심했죠.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닌가?”
바로 그때 이사야가 선포했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셨다”고 말입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은 우리를 아직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선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믿음의 선포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위해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 하나를 던질 수 있습니다.
과연, 이 견고한 성에 누가 들어갈 수 있을까요?
3절에서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의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여기서 '심지가 견고한 자'란, 곧 의지와 생각이 하나님께 고정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현실은 흔들릴지라도, 마음은 하나님께 닻을 내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자에게 주시는 것이 바로 ‘shalom shalom’ — 평강의 평강입니다.
이는 단순한 마음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누리는 온전한 회복과
안전을 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때로 흔들릴 수 있지만,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으시는 반석이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내 의지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의지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강은 환경이 안정되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시선이 문제에서 하나님께로 옮겨질 때 흘러옵니다.
우리가 ‘영원한 반석’ 위에 서면,
어떤 바람도, 어떤 실패도, 우리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이사야의 이 고백은 단지 과거의 노래가 아닙니다.
이사야가 본 '견고한 성읍', '의로운 나라', '평강의 평강'은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라, 장차 오실 메시아 안에서 이루어질 새 창조의 예언이었습니다.
놀라운 복음은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반석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반석이 되셨습니다.
[ 본론 2 ]
이제 이사야의 그 노래가 어떻게 복음 안에서 완성되는지를 함께 바라보려 합니다.
성경은 여러 번 '반석'을 하나님 자신으로 비유하죠.
출애굽기 17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목마를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을 치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됩니까? 그 반석에서 생수가 흘러나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장면을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전 10:4)
뜨거운 광야 한가운데서,
하나님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광야의 반석은 그리스도의 예표였습니다.
그분이 치심을 당하실 때, 생명이 흘러나올 것이기 때문이죠.
이사야가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시다"라고 고백할 때,
그는 알지 못했지만, 그 말은 결국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 반석이신 분이 깨지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치심 당하게 하셨습니다.
나의 죄, 나의 흔들림, 나의 불신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깨어진 반석에서, 생명의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절정이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앞서 살펴본것처럼 우리에게 흘러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과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 즉 샬롬입니다.
진짜 샬롬은 깨진 반석 위에서 흘러나오는 은혜의 생명입니다.
예전에 심방중 어떤 성도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목사님, 제 인생은 이미 깨진인생 같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 깨진 곳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더 들어올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은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그 깨진 자리, 그 상처 난 틈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서질 때, 하나님은 그 틈으로 평강을 부어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반석 되신 복음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그 반석을 '영원한'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모든 세대, 모든 시대'를 포괄하는 단어입니다.
시간의 경계를 초월하는 것, 그리스도는 바로 그 영원의 반석이십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은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우리가 우리 주님께 기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변하고, 관계는 흔들리지만, 그분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 세우신 약속을 취소하지 않으십니다.
그 약속의 증거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견고하신지를 알게 됩니다.
그분은 우리의 고통 속에서도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향한 사랑을 한 번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영원히 서 계신 반석,
그러나 동시에 우리를 향해 무너져 내리신 사랑이십니다.
이 모순 같은 복음이야말로 우리가 붙들 평강의 근원입니다.
반석이신 하나님이 부서지심으로, 우리는 서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복음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실제가 됩니다.
인생의 무게가 우리를 짓눌러도, 하나님은 그 자리에 함께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당한 고난을 없애지 않으시지만, 그 안에 함께하십니다.
앞서 살펴본것처럼 이사야는 절망 속에서
하나님이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셨다"고 노래했습니다.
그 말은 곧,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직접 둘러싸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의 가정을, 일터를, 인생의 골짜기를 둘러싸고 계십니다.
그분이 계신 한, 어떤 세력도 우리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믿음은 이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이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평강을 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반석 위에 선다는 것은 감정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눈물 속에서도 서 있다는 뜻입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도 무너져 내리셨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고백하셨죠.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도다.'”
그분은 완전한 평강의 주님이시지만,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고통을 통과하심으로, 우리에게 참된 평강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참된 복음입니다.
평강은 고난이 없는 삶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확신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평강의 주님, 영원한 반석이십니다.
그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쉼을 누립니다.
세상이 흔들려도, 우리의 영혼은 안전합니다.
[ 결론 ]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나님은 이사야의 노래를 우리 입술에도 주십니다.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시다."
이 고백은 절망의 한가운데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소망의 선포이기도 합니다.
이 노래는 현실을 바꾸지는 않지만, 우리의 시선을 바꿉니다.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분이 여전히 우리 삶의 주인이심을 믿게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 반석 위에 서시겠습니까?
무너지는 것 같은 인생의 한가운데서도, 함께 이 노래를 부르시겠습니까?
오직 반석이신 주님만 바라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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