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안과 밖 | 날짜 | 2023년 10월 29일 |
본문 | 창세기 7장 6-12절 | 비고 | 주일 밤 예배 설교 |
우리 교회는 하반기 새생명축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주 타켓은 여러분들이 포스터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사랑하는 친구 초청”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예기치 못한 일들을 얼마나 많이 경험하셨나요?
갑작스러운 건강 문제, 자녀들의 앞날에 대한 염려, 그리고 직장에서의 어려움까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들은 늘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디서 안정감을 찾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고민에 대한 답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의 사랑하는 친구들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겁니다.
여기에 포커스를 맞춰서 오늘 우리가 함께 말씀을 나누고, 더불어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
불확실한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다름아닌 우리를 구원하시고 보해해주시고 인도해주시는
참된 방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쯤에서 우리 교회의 4대 표어를 다시 한번 되새기면 좋겠습니다. 기억하고 계시지요?
예배 공동체, 제자 공동체, 사랑 공동체, 선교 공동체입니다.
이 4대 비전은 앞으로 우리교회가 주님 오실때까지 품고 나가야 될 비전입니다.
마지막 선교 공동체는 곧 전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 자체가 전도이고 곧 선교이지요.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승천하실 때 많은 사람들에게 명령하신 지상명령을 기억합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사명”입니다.
사명은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생명보다 귀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혼구원을 위해 힘써 달려가야 하는것이죠.
현재 세상은 큰 죄악 가운데 있습니다. 각종 기사들을 보십시오.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부모가 자식을 학대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고 타인의 생명을 너무 쉽게 빼앗아 갑니다.
더불어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범죄들, 죄악된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무엇처럼 말입니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시작된 죄는 아담과 하와를 넘어 가인과 아벨까지 이어집니다.
인류 최초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죄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더 확대 됩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죄가 수치였다면 가인과 아벨을 넘어 라멕으로 넘어가며
이제는 그 죄가 자랑으로 변신합니다. 라멕은 젊은 소년을 죽이고 자랑하며 노래를 부릅니다.
그리고 창세기 6장에 이르러서는 더더욱 커져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확대된 것을 볼 수 있죠.
세상이 어느정도로 타락했을까요?
창세기 6장 11-13절
11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지금 본문을 보면 부패하다, 파괴하다라는 단어가 3번 등장하는데 이것은 강조의 형태죠.
이는 온 땅에 극치에 달한 타락의 심각성을 강조한 겁니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들이 땅에 충만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과는 전혀 반대로 포악함이 온 땅 가운데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한탄하시며 모든 것을 다 쓸어버리실 계획을 하시죠
그리고 그 계획을 이루시기 전에 한 사람을 불러 주시는데 그게 바로 노아입니다.
이렇게 소망이 없는 가운데 6장 8절을 보니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노아는 동시대에 악을 행하는 사람들과 대조되는 인물이었지요.
9절 말씀을 보면 이런 노아의 특징을 설명합니다. 함께 읽어볼까요?
창세기 6장 9절
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의인이고 완전한 자라는 것은
동시대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선한 삶을 살았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의존적 관계를 유지했다는것이죠.
하나님은 이런 노아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를 통해서 놀라운 일을 일으키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가죽 옷을 입혀주십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 인해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셋을 허락해주십니다.
홍수라는 심판을 피할 방주를 허락해주셨습니다.
광야에서는 성막으로 주어졌으며,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후에는 성전으로 주어졌지요.
그리고 신약에 와서는 구원의 처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은혜로 구원을 허락해주십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번 생각해봅시다.
지금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요?
당신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이 죄를 범합니다.
만드신 후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정도로 기뻐하셨던 하나님이시죠.
그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으로 모든 인간들을 죽이셔야 하셨는데.. 어떠셨을까요?
죄악으로 가득 차 있는 이 땅을 심판하셔야 했지만
분노와 증오로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아픈 마음으로 심판하시지 않으셨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창세기 6,7,8장에 등장하는 노아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심판을 피할 길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방주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방주는 생명이고 방주는 구원이고 오직 방주만이 살길입니다.
방주는 우리가 생각하는 배와 다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뱃머리는 앞이 뾰족하고 물살을 헤쳐나갈 수 있지만, 방주는 그렇지 않아요.
직사각형의 거대한 배로서 추진할 수 있는 방법도 없고, 조정 장치도 없습니다.
하지만 방주안에 있으면 생명을 보전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방주가 무엇이기 때문에 그렇지요?
방주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예수님을 드러낸다는 거예요.
죄악으로 인해서 심판을 받아 죽어 마땅한 자들에게 살길은 오직 방주밖에 없습니다.
방주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이었듯이,
오늘날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구원의 방주가 되십니다.
방주는 단순한 배가 아니었습니다.
방주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구원의 도구였고,
그 안에 들어간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이 바로 그 방주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불안하고, 죄로 가득한 세상에서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 우리의 방주가 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 안으로 피할 때, 죄와 심판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세계에서 선교사님들이 왜 사역하고 있습니까?
선교사님들은 선교지 현장에서 다른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방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일한 구원의 길인 방주를 말입니다.
여러분도 오늘부터 사랑하는 친구나 가족들에게 방주를 소개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함께 예배의 자리에 나오는 것이야말로 그들을 방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이번 새생명축제가 그 기회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의 사랑하는 가족들 혹은 친구들중 방주 밖에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신다면 방주 밖, 물에 두시는 것이 아니라
방주 안으로 데리고 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핵심이지요.
그리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노아는 방주를 몇 년 동안 지었습니까?
우리가 흔히 120년이라고 알고 있는데 아닙니다. 여러분
노아가 방주를 짓는 기간에 대해 성경이 명확히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창세기 6장 3절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수명을 120년으로 제한하신다고 말씀하시지만,
이는 방주 건축 기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방주를 짓는 동안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믿음을 지켰다는 사실입니다.
노아는 어땠을까요?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방주를 지을 때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은 그를 향해서 뭐라고 했을까요?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 주변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을 것입니다.
비가 내리지 않는 동안 거대한 방주를 짓는 노아를 얼마나 미련하게 생각했겠습니까?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끝까지 순종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믿음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믿음을 지킬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더불어 방주는 산꼭대기에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아요.
단지 성경은 방주가 홍수 이후 아라랏산에 멈췄다고만 나옵니다.
생각해보면 일반적으로 평지에 지었다고 하는게 더 타당해보이기도 합니다.
방주는 매우 큰 구조물이었고, 수많은 동물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하기에
지형적으로도 평지가 더 적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볼 때 미련하게 그것을 짓고 있는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방주를 짓는 데 시간이 걸리고, 주변 사람들의 비웃음을 견뎌야 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 사람들은 어땠습니까? 그들은 노아를 비웃고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결과는 방주 밖에 있던 모든 사람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보면 지금 우리가 하는 새생명축제가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미련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연말이 되니 교회들이 또 전도를 하는구만~ 또 우리를 괴롭히는구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죠.
더불어 냉정하게 말하면 교인들도 회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요.
우리가 리모델링을 앞둔 이 시기에 꼭 이 시기에 이런걸 해야 해?
리모델링이 끝나고 교회가 좀 멋지게 변화하고 나서 하면 안되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이 시기에 우리 교회를 통해서 하실 일이 있으셔서
우리를 통해 이런 사역들을 하시길 원하시는 겁니다.
안타깝지만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을 한번 찾아볼까요?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고린도전서 1장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전서 1장 21절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전도를 하며, 우리는 종종 그런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복음은 미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입니다.
세상은 그것을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전도는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선택하신 방법입니다.
그들에게는 미련해 보일지라도, 우리는 담대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은 스스로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구원에 대해서 알 수 없습니다.
일반계시를 통해서 그들이 말하는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 수 있겠으나,
구원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해야 하는 겁니다.
그들이 보기에 미련해 보이는 이 프로젝트를 해야 하는거예요.
노아가 묵묵히 방주를 지은 것처럼 우리는 묵묵히 복음을 전달해야 합니다.
방주 안으로 들어오라고 해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방주 안은 생명이고 방주 밖은 죽음이라고 말입니다.
심판이냐 구원이냐 두 가지중 하나밖에 없습니다.
양다리를 걸칠 수 없습니다.
방주에 들어가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생명과 죽음의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기회가 단 하나밖에 없었고,
그것은 방주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예수님 안에서 구원을 얻는 것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는 이 구원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방주에 들어가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의미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우리의 방주로 삼는 것은
그분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과 함께할 때, 우리는 죄로부터 구원을 얻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짐을 지시고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무엇보다 친구들을 방주로 초대하십시오.
그들에게 전하십시오. 방주만이 살길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의 가족과 친구들을 방주로 초대하는 것은 단지 말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들을 교회로, 예수님 앞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들과 시간을 보내고 대화를 나누며, 교회에 나와 함께 예배드리자고 권하십시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의 행위는 그들을 구원의 자리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번 주에는 여러분의 친구나 가족들에게 한 마디 전화를 걸어보십시오.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어. 10월 말에 함께 예배에 나와보지 않을래?"라고 말하십시오.
그리고 교회에서 나눠드릴 초대장과 전도지,
작은 선물들을 전달하시며 예수님을 소개하십시오.
예수님을 소개하는 이 작은 초대가 그들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어떤 것보다 큰 일이 바로
그들을 예배의 자리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스스로가 노아가 되십시오.
노아의 이름은 안식하다라는 히브리 단어 ‘누아흐’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고로 노아는 안식과 관련된 인물입니다.
여러분들이 노아가 되셔서 사람들에게 참된 안식의 길을 알려주십시오.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그들에게 참된 안식, 짐을 해결해주시는 분을 알려주십시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지막으로 노아가 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분명히 성경은 8절에서 노아가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고 말합니다.
1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노아만 방주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들어갑니까?
그의 가족들, 아들과 며느리들과 함께 들어갑니다.
노아를 통해서 그의 가족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들 스스로가 노아가 되어
묵묵히 사람들을 구원의 방주를 소개하고 초대하십시오.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생명과 죽음을 가르는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노아가 방주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와 그의 가족은 모두 멸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노아는 하나님의 구원의 방주로 들어갔고,
그 결과 그는 가족과 함께 구원을 얻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동일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방주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뿐 아니라,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의 구원과도 직결된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생명과 죽음을 가르는 결정적 순간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방주로 나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방주 안으로 초대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친구와 가족들이 구원의 자리에 나오지 못한다면,
그들의 영원한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사랑하는 친구들을 구원의 방주로 초대하십시오.
그들의 영혼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랑의 행위는
바로 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노아는 구원을 받아 방주 안에 들어갔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와 같은 믿음과 순종으로 예수님의 방주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하는 이들도 그 안으로 데려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신 사명은 생명보다 귀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결단하고, 그 사랑하는 이들을 구원의 방주로 데려오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통해 영혼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고 복음을 들고
여러분들의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강하게 전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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