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 목사 설교/수요 및 금요기도회 설교 원고

땅에서 하늘을 산 사람들, 20240915

하엘빠 2024. 9. 14.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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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땅에서
하늘을 산 사람들
날짜 20240915
본문 다니엘 13-9 비고 주일 오후 예배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창세 전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택함받은 거룩한 백성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나아가는 존재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목적과 궁극적인 소망은 이 땅이 아닌,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빌립보서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입니다.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오늘은 다니엘서 말씀을 통해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들은 낯선 이방 땅에서 지내며 많은 도전과 시련을 겪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그들의 정체성과 신앙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이들이 마주한 어려움은 오늘날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어려움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낯선 환경과 수많은 위협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께 충성하며,

그들의 믿음을 지켰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깊은 도전을 받고,

다시금 우리의 삶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먼저 역사적 배경을 살펴볼까요?

다니엘서 1장의 배경은 주전 605년경,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침략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바벨론은 앗수르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패권을 장악했고,

이로 인해 바벨론 제국이 떠오르게 됩니다.

 

바벨론은 유다를 침략하였고, 이때 1차 포로들을 끌고갑니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 제국의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의 통치 아래서 정치적, 군사적, 문화적으로 최고로 발전을 이뤘으며

40년이 넘는 시간동안 바벨론 제국을 다스렸습니다.

 

그의 관심은 온통 바벨론 제국이 더 성장에 있었기에 정복한 나라들의 포로들을 끌고 왔습니다. 이 때 함께 끌려온 지식인들의 무리중에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두 나라에 속해 있습니다.

 

이미와 아직의 사이에 서 있는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이 세상이 우리의 본향이 아니니, 우리는 이 땅에서 함부로 살아가도 괜찮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레미야 297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297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벨론에서 집을 짓고, 텃밭을 가꾸며 그 땅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바벨론과 동화되어 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땅에서 살되,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거룩한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출애굽기 195-6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이 언약을 기억하며,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이방 땅에서도 끝까지 하나님께 충성하며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도 그들과 같이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바벨론에서 두 가지는 허용했고, 한 가지는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름을 바꾸고 학문과 언어를 배우는 것은 허락했지만, 왕의 음식은 거부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오늘 이 이야기를 통해 많은 것들을 깨닫고자 합니다.

 

학문과 언어를 배움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유다에서 이미 엘리트였습니다.

이들은 귀족 출신으로 왕족과 귀족중에서 선택된 자들이었습니다.

 

3-4절을 볼까요?

3 왕이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 몇 사람

4 곧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설 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고

 

느부갓네살은 그들을 데려와 그들의 바벨론의 학문와 언어를 배우게 했습니다.

그들을 등용하여 바벨론을 위해서 사용하기 위함이지요.

 

당시 바벨론은 고대 세계의 강국으로서 천문학, 수학, 문학, 법률, 종교등 모든 면에서

굉장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천문학과 점성술이 최고로 발달되었어요

하늘을 보며 계산하고 별들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점성술에 많은 관심이 있었어요.

 

이들의 학문은 이후 로마와 그리스에도 영향을 미쳤고, 현대 과학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 개념, 1시간은 60,

1분은 60초로 나누는 방식도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세계의 초 강대국 바벨론에서 학문을 배우고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학문을 배운다는 명목하에 어떠한 도전을 맞이하게 되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언어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 나라의 가치관과 이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들로 하여금 학문을 배우게 하고, 언어를 배우게 한다는 것은

바벨론 제국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그들에게 심어주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세계관이 무엇입니까?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기본적인 틀이나 개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하나님 중심으로, 말씀을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느부갓네살의 의도가 눈에 보이시지요?

이들로 하여금 유다의 가치관, 그들의 언어를 모두 지워버리고

철저한 바벨론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느부갓네살의 의도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지금 이 친구들은 이런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그런데 참 대단하게도 이들은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배웠습니다.

학문와 언어를 배우며 바벨론화 되지 않고 철저하게 여호와 중심의 신앙,

기독교 세계관을 그대로 유지했던 것이지요.

 

여러 여러움 앞에서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11절을 믿으며 창조신앙을 믿습니다.

그런데 요즘 시대 학교나 세상은 창조가 아니라 빅뱅이론과 진화론을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그것을 가르칠 때 배우지 말아야 됩니까? 아닙니다.

배워야죠. 배워서 시험을 잘쳐야죠. 좋은 점수를 맞아야죠.

하지만 배우기는 배우되 그것에 동화되지 않는겁니다.

 

내가 비록 진화론을 배우지만 나는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다는 굳건한 믿음이 있어야죠.

 

세상의 지식을 배우기는 배우되, 그 지식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해서는 안되죠

우리의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이 지금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지켰던 것입니다.

 

2. 이름을 바꿈

이름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이름은 개인의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제 이름이 민기입니다. 화할 민, 높을 기를 사용합니다.

화목하며 높은 사람이 되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요.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의 이름을 볼까요?

 

다니엘 16-7

6 그들 가운데는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니

7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

다니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이시다입니다.

엘은 하나님을 의미하죠.

이름에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가있다는 것은 그의 신앙과 정체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하나냐죠. 이는 여호와께서 은혜로우시다는 뜻입니다.

하난은 은혜를 의미하고, 야는 여호와를 의미합니다. 역시 이름에 하나님이 들어가있죠.

 

셋째로 미사엘입니다. 뜻은 누가 하나님과 같겠는가?”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분이 없다는 믿음의 고백이지요.

 

마지막 아사랴입니다. 뜻은 여호와께서 도우신다입니다.

앞선 이름들과 같이 이름에 하나님이 들어가있지요.

 

지금 다니엘과 친구들의 이름만 봐도 그들이 신앙상태가 어떤지 충분이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부모들이 이들을 어떤 마음으로 길렀는지 알 수 있어요.

 

그런데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왕실에 들어가며 이들의 이름이 변하게 됩니다.

 

다니엘은 벨드사살, 하나냐는 사드락, 미사엘은 메삭, 아사랴는 아벳느고로 변형을 시키지요.

 

다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이는 뜻에서

벨드사살 즉 벨이여 왕을 보호하소서로 바뀝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사라지고 바벨론의 신 벨의 이름이 들어가게 되죠.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시다는 뜻의 하나냐는 사드락으로 바뀝니다.

역시 하나님의 이름은 지워지고 바벨론의 달의 신과 관련된 이름을 갖게 됩니다.

 

누가 하나님과 같겠는가?의 미사엘은 메삭으로 바뀝니다. 이 역시 하나냐처럼

바벨론 사람들이 섬기고 있는 달의 신 아쿠와 관련된 이름을 가지게 되지요.

 

마지막으로 아사랴는 아벳느고로 바뀝니다. 이는 느보의 종이라는 뜻입니다.

느보는 바벨론의 지혜의 신입니다.

 

이렇게 이름 자체에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가 있던 친구들의 이름은

모두 바벨론화 되어 하나님의 이름은 온데간데없이 바벨론 신의 이름들로 가득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에서 이름은 개인의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특히 히브리인들은 이름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름에 하나님을 넣어 자신들의 신앙과 믿음을 그대로 드러내려고 했죠.

 

하지만 바벨론은 그들을 바꾸려고 했습니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그들의 정체성을 바꾸고 그들이 섬기는 신을 바꾸려는 시도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죠.

일제강점기 기간동안 우리민족들에게 가해진 여러 가지 억압정책중 하나가 창씨개명이지요.

 

일본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을 바꾸고 이름을 일본식으로 개명하라고 했습니다.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꿈으로 인해, 조선인들의 정체성을 말살하고,

일본에 동화되길 바랬기에 그렇게 했습니다.

 

당시 역사를 살펴보면 실제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학업, 직업, 공공시설 이용등에서

차별을 당했습니다. 한마디로 여러 가지면에서 심한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지금 이와 비슷하게 바벨론은 사로잡아온 이 친구들을

친바벨론화 하기 위해서 그들의 이름을 바꿔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의 정체성을 바꾸려고 합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게 합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이념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정체성을 흔듭니다.

세상은 우리가 본래 모습을 잊고 세속적으로, 세상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길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족속이라 부르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죠.

 

베드로전서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이름이 바뀌었어도

그들의 신앙의 정체성은 절대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코로나19라는 전무후무한 어려움 앞에서 신앙의 자리를 떠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니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숨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코로나19로 인해 모여서 예배드리기가 어려웠죠.

모여서 예배 드리지 못하니 우리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모두들 한번의 예배를 너무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앤데믹 상황이 되고 마음이 편안해지니, 그저 그때 경험했던 편안함에

완전히 젖어들었습니다.

 

그저 온라인으로 예배드리거나, 주일에 한번만 예배를 드리면 된다는

잘못된 생각에 빠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세상의 어떠함과 내 자신의 안락과 편안함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오늘이나 초대교회때나 교회는 여전히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달라졌습니다.

초대교회때 교회가 손가락질 받은 것은

왜 세상과 다르지 않냐?”고 손가락질 받았습니다. 이들은 거룩하게 구별되었으며

당시 사회와 문화가 즐기던 쾌락과 향락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초대교회때와 똑같이 손가락질을 당합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왜 우리와 다르지 않냐?”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거룩한 공동체라고 하면서

세상과 똑같이 사기치고, 범죄하고, 남을 헐뜯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세상과 반드시 구별되어야 합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이름은 바벨론화 되었지만 신앙을 지켰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새로운 이름과 정체성을 주입하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처럼

세상을 따르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따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뜻을 정하여 음식을 거부하다

학문과 말을 배우고 이름을 바꿨던 이들이지만 한가지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여기서 뜻을 정하다는 말은 다니엘의 마음을 그대로 나타냅니다.

 

히브리 원문으로 보면 마음을 두다는 의미입니다.

즉 다니엘은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만 두기로 확고한 결심을 내렸다는 것을 의미하죠.

 

그리고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죠.

이것은 종교적으로 부정함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우리는 흔히 알기로 왕의 음식과 포도주는 율법에 따른 음식규례로서 부정한 음식이며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이기에 이것을 거절한것이다라고 알고 있습니다.

 

맞아요 맞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본다면 뭐가 개운하지 않습니다.

 

당시 문화적 관점으로 본다면 왕실에서 제공되는 모든 음식들은

바벨론의 신들에게 바쳐진 후에 먹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었습니다.

이런 종교적 의식은 매우 보편적이었으며, 이를 통해

그들의 신을 잘 섬기자는 일종의 공동체 화합의 의미도 담겨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먹고 마셨던 채식과 물은 우상에게 바쳐진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들이 왕실에서 먹었던 채소와 물 역시 그들의 신에게 바쳐졌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면에서 본다면 음식이 부정하기 때문에 먹지 않았다는

주장은 그리 효력이 없어 보입니다.

 

이것은 신약시대때도 알 수 있지요. 고린도전서 8장과 10장을 보면 바울이 이 문제를 다루죠.

당시 고린도교회내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문제로 교회내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8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 자체는 그 어떤 효력이 없음을 바울은 주장합니다.

왜냐면 우상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가짜니까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믿음이 약한 자들이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는 먹지 말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왜 왕의 음식을 거절했을까요?

이들이 왕의 음식을 거부한데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죠.

 

왕의 음식을 거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특정된 부정적인 음식이라서가 아니라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주는 사람에게 종속되는 개념입니다.

 

즉 느부갓네살 왕이 제공하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곧 나의 삶의 주인이 느부갓네살과 바벨론의 신이라는 의미입니다.

 

나의 먹을 것과 모든 것을 공급해 주는

원천, 왕의 은혜와 보호를 받는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들은 지정된 왕의 음식과 그들이 마시는 포도주를 거부했고,

환관장이 주는 채식을 하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들은 원래 누구만 섬기기로 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 한분만 섬기기로 다짐했습니다.

 

출애굽기 203

너는 나 이외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두 돌판에 직접 기록해주신 율법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에게

충성하거나 의지하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이죠.

 

신명기 613-14

13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14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르지 말라

 

사랑하는 여러분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그들의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확고히 하고자 왕의 음식을 거부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왕실에서 교육받고 궁정에서 살았지만

내적으로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들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우리의 유일한 충성의 대상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밖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충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돈이 필요합니다. 돈 없이는 살아갈 수 없죠

그러다보니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성경에서도 말하죠. 맘몬신이라고 말입니다.

 

누가복음 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이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그러다보니 우리는 하나님보다 돈에 충성하며 살아갑니다.

돈의 노예가 되어 24시간 365일 뼈빠지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살아가서는 안되겠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이런 충성의 표시로 음식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내 삶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나는 하나님만 섬기겠다.

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다라는 위대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들의 고백은 신명기 6장에 나오는 쉐마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죠.

가장 유명한 신앙고백중 하나입니다.

 

신명기 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런 믿음의 고백이 오늘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바벨론에서 정체성을 지키며 하나님께 충성한 모습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예표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죄와 유혹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으셨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다니엘의 결단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희생의 결단을 미리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의 유혹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십자가에서 죄와 사망을 이기셨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진정한 구원자와 왕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며 세상 속에서 정체성을 지키는 이유는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 때문인줄 믿습니다.

 

말씀의 결론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흔들려는 세상의 압박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충성과 믿음을 지켰습니다.

 

바벨론 제국의 학문과 언어를 배우고 이름을 바꿨지만

그들이 누구에게만 충성해야 하는지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여러 가지 유혹에 직면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세상은 우리의 가치관을 바꾸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지 3가지로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매일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내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둘째, 세상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과 구별되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세상과 똑같이 살지 않고 구별되며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하고 기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셋째, 충성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다니엘과 친구들은 왕의 음식을 거부하며 하나님께 초점을 맞췄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자신들의 주인으로 삼았고, 하나님께만 충성을 다짐했습니다.

세상은 지금도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른것들을 주인으로 삼게 만듭니다.

하지만 나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께만 충성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합시다.

 

다니엘과 친구들은 바벨론의 강력한 압박 속에서 하나님께 충성했지만,

그들의 충성은 결국 하나님의 구속 계획 안에서 완성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유혹과 고난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충성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에게 진정한 해방을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다니엘처럼 살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세상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줄 믿습니다.

 

세상의 도전과 유혹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삶을 다짐하며,

매 순간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0240915 땅에서 하늘을 산 사람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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