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 목사 설교/수요 및 금요기도회 설교 원고

죽음 앞에서 당당한 이유, 20240616

하엘빠 2024. 6. 17.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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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죽음 앞에서 당당한 이유 날짜 2024616
본문 디모데후서 46-8 비고 주일 오후 예배 설교

 

여러분 혹시 죽음의 공포를 느껴보신적이 있습니까?

저는 몇 년전 청년들과 캄보디아 단기선교를 다녀왔습니다.

당시 비행기를 타고 중국 상공을 날고있는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난기류를 만났습니다.

 

그러자 비행기가 순식간에 위아래로 요동쳤습니다. 너무 무서워서 옆에 앉아있던 청년과 손을 꼭 잡았습니다. 둘 다 손이 땀범벅이 되었었습니다. 난기류를 무사히 통과 후 다른 청년들에게도 물어보니

그 순간들이 다들 너무 무서웠다고 했습니다.

 

제가 죽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만큼 무서웠고 두려웠습니다.

한편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직 제가 더 성숙되어져야 되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죽음은 무섭고 두렵고 떨림이 아니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첫 번째 발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 초연하지 못한 제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마도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죽음 앞에서 저와 비슷한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은 죽음 앞에서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에 들어가길 선택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사도바울 역시 이런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죽음의 문턱 앞에 있는 바울의 모습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도전을 받으시고 바울과 같은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

바울처럼 죽음앞에서도 당당한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바울서신입니다.

바울은 신약성경에서 예수님 다음으로 위대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총 13권의 서신서를 기록했습니다. 히브리서가 작자 미상이긴 하지만

만약 바울이 히브리서를 기록했다고 한다면 총14권입니다.

27권의 성경중 14권을 쓴 사도바울입니다.

이토록 위대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실제로 신학자들은 바울신학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바울의 신학을 정리해서 공부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위대한 믿음의 사람, 바울의 마지막을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바울의 옥중서신이 있지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죠.

하지만 이 옥중서신들을 잘 살펴보면 바울이 다시 나가서 성도들과 교제할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특히 빌립보서를 보면 바울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죠.

빌립보서 123-24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바울은 사랑하는 주님 곁으로 가고 싶지만, 성도들을 위해서 남을 것을 말합니다.

자신이 좀 더 살아갈 것에 대해서 말을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읽은 디모데후서는 다릅니다. 바울 스스로가 죽을 것을 예상하고 직감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오늘 본문 말씀을 읽겠습니다.

 

디모데후서 4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전제는 번제와 함께 드리는 제사의 한 종류입니다. 제사의 마지막 단계로서 부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전제의 의미가 귀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헌신적인 봉사, 주를 위해 생명까지도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거룩한 희생을 상징합니다.

 

지금 본문에 등장하는 바울의 모습이 딱이지요.

 

바울은 로마서 121절에서도 이와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지금 바울은 자신이 고백한 것처럼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로 드리려고 합니다.

제사가 마무리 되는 것처럼 복음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삶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래서 옥중서신과 달리 이제는 죽음을 직감하며 이 서신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이 이 서신을 기록하고 있는 장소는 로마감옥입니다.

여기는 아마 여러분들이 한번쯤은 들어보셨을만한 장소입니다.

 

이곳은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차디찬 지하감옥입니다. 이 감옥에는 인권이라고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냥 죄수의 몸만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먼저 감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죄수가 죽을만큼 맞아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맞고 이미 온갖 고문을 받고 죽을만큼 아픈 가운데서 들어갑니다.

 

그리고 감옥에 들어와있다는 말은 심하게 맞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죽던지,

아니면 시간이 좀 흐르고 사형을 당하던지 반드시 죽을 사람들만 이 감옥에 들여보냅니다.

쉽게 말해서 죽던지, 곧 죽을 예정이던지 둘 중 하나입니다.

 

바울이 지금 이런 상황에서 로마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바울은 차디찬 지하감옥에서 아무도 없이 외롭게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을 기억해보십시오. 바울이 지금 왜 감옥에 들어갔습니까?

그가 정치적으로 선동질을 했습니까? 아니면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습니까?

사람들을 현혹하고 미혹케 했습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목숨을 다해 그저 그가 만난 예수 그리스를 전했을 뿐입니다.

많은 나라들, 많은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며 선교여행을 했기 때문에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복음을 증거하다 유대인들의 모함에 의해 잡혀서 들어갔죠.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성했기 때문에 죄인의 신분으로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보십시오. 바울의 모습, 억울해요 안억울해요?

우리가 지금 인간적인 눈으로 바울을 보면 얼마나 비참합니까?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했다고 말하는 믿음의 사람의 마지막이 이렇습니다.

지금 그의 곁에 누가 있습니까? 없어요. 그 누구도 바울을 지켜주지 않고, 위로해줄 사람도 없어요.

죽을 만큼 고통스럽고 아프고 힘든데, 그리고 곧 죽을 예정인데 아무도 곁에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눈으로,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바울보다 비참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토사구팽이라는 말이 있지요. 실컷 잘 써먹고 버림을 당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죽음을 앞두고 옥중서신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앞두고 있는 바울이 그의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힘써 믿음을 붙들 것을 권면합니다.

 

이상합니다. 만약 우리가 바울과 같은 상황에 놓여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불평하고 불만을 터트리고 울며불며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욥의 아내가 욥에게 말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욕하고 죽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바울은 달라도 너무 달랐어요.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귀한 믿음의 모습과 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8절을 말합니다. 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바울은 지금 자신을 위해 예비되어 있는 면류관을 바라봅니다.

그는 육신적으로는 매우 초라해보이나 영적으로는 초라해보이지 않습니다.

 

왜요? 그에게는 주님께서 주시는 상급, 천국의 상급이 예비되어 있음을 알고 있기에

절대로 초라해보이지 않습니다. 천국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우리 역시 이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약속된 면류관, 천국 상급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땅에서 살아갈 때 비록 힘들고 어렵고 아프게 살더라도 비참하게 살지 않는 것입니다.

 

요셉은 노예로 팔려 노예로 살았지만, 진짜 노예로 살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고, 그에 합당한 믿음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이미 알고 있어요.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죽음 이후에 영광 스런 상급이 없으면 가장 비참한 사람이예요.

요즘 젊은이들 언어로 흙수저라고 하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볼 때 내 삶이 형편없는거예요.

부자도 아니고, 건강도 좋지 않고, 가진것도 없어요.

 

남들과 비교해서 보며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가장 밑바닥에 있어요.

 

하지만! 바울이 가진 이 하늘의 면류관, 하늘 소망, 주님을 소망하며 사는 사람은

그 사람이 가장 귀하고 보배로운 사람인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이런 하늘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바울이 이렇게까지 죽음 앞에서 견디고 담대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디모데후서 1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바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바울은 고백하죠! 내가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않고!!

지금 감옥에 갇히고 두들겨 맞고 죽음을 앞둔 엄청난 고난 속에 있습니다.

 

지금 바울이 말하는 이 고난에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우리 주님께서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사용된 단어와 동일합니다. 바울이 지금 그런 고난을 당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고난을 피하거나 숨기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는답니다.

 

이 부끄러움은 감정적으로 느끼는 수치, 부끄러움이 아니라 바울의 분명한 신앙고백입니다.

 

이미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말했지요.

로마서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가 당했던 고난,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미래에 대해서 추호의 의심도, 변명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왜 이렇게 바울은 당당할 수 있었습니까? 대체 무엇이 그를 이토록 견고하게 만들었을까요?

우리가 읽은 12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디모데후서 1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바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지금 누구를 안데요?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바울은 분명하게 자신이 믿는 대상에 대해서 알아요. 지금 누구를 믿습니까?

맞아요! 자신이 박해했던, 자신이 그토록 싫어했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의지하는 분이 누군지, 내가 믿는 믿음의 대상이 누군지 분명하게 알아요.

지금 감옥에서 죽음 앞에 있는 바울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셔요?

 

우리가 좀전에 4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은 자신이 죽으면 천국으로 데려갈 분이지요.

더 세밀하게 말하면 나에게 의의 면류관을 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예수님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지금 고난 당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죽음을 겁내지도 않아요.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질 의의 면류관을 얼른 받아 쓰고 싶어서 천국으로 가고 싶어하는

엄청난 확신에 찬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2절 다시 읽습니다.

디모데후서 1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바울은 자신이 의탁했다고 말합니다. 무엇을 맡겼을까요?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바울은 지금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긴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회심이후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겼습니다. 우리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선언하며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았지요.

 

여기서 말하는 의탁이라는 단어의 원의미는 적금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지금 자신이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맡겼는데,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끝까지 지켜주실 것을 확신했던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과 같은 이런 굳건한 확신을 가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무슨 확신입니까? 내 삶에 하나님께 붙들렸다는 확신! 내 생명을 하나님께서 지키고 계신다는 확신!

 

코로나19가 시작되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의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저 예배의 자리를 떠난것뿐 아니라 통계적으로 살펴봐도 신앙 자체를 떠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확신이 없는 거예요.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고 있는것처럼

다른 복음이 없듯이 하나님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다른 확신도 없어요.

 

이 시대가 복음의 능력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확신이 사라졌습니다.

어떤 확신이죠?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믿는 예수를 알고 그 예수께서 나를 끝날까지 지키실 것이라는 확신말입니다.

 

바울은 이런 분명한 확신이 있었어요.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천국에 대한 확신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 차디찬 로마의 지하감옥 가운데서도 좌절하고 절망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바울은 이런 죽음의 문턱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지금 자신을 걱정하는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썼습니다.

죽음 앞에서 오히려 디모데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 바울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먼저 신앙생활은 좁은 길입니다. 신앙생활 하는 것, 믿음 생활한다는 것은 내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좁은 길을 가는 것은 다릅니다. 바울이 지금 고난을 당하며 좁은 길로 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하며 어려움을 당하는 것 지극히 당연합니다. 고난이요? 당연히 여기십시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을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원형 경기장안에서 주님을 부인하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요한의 제자 폴리갑은 서머나 지역에서 기독교인들의 핍박이 있을 당시 잡혔습니다.

굉장히 현명하고 영향력이 있던 폴리갑이기에 사람들은 그가 화형을 당하지 않도록

회유책을 사용했습니다.

 

폴리갑! 딱 한번만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해라! 그러면 살려주겠다가 조건이었습니다.

예수를 부인하지 않으면 화형을 당할 위기 가운데 처한 상황이었죠.

 

그런데 폴리갑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다함께 읽기 -

”86년간 예수님은 단 한번도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지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 수 있겠는가?“

 

폴리갑은 이렇게 말하고 화형대에서 순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굳건한 믿음을 가지십시오, 고난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혹시나 여러분들이 고난 가운데 있습니까?

지금 바울처럼 여러분 곁에 아무도 없고 홀로 외롭게 힘들다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기억하십시오.

고난 가운데 있지만, 사망의 음침한 길을 간다고 할지라도

나와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고난의 길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의 길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믿음과 확신을 가진 사람이 되십시오.

그럴 때 어떠한 어려움 앞에서, 특히 모두가 두려워하는 죽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함께 충만이라는 찬양을 하겠습니다.

제가 지난 금요일, 토요일 사랑의 교회에서 하는 중보기도 세미나를 다녀왔습니다.

 

오고가는 왕복 4시간동안 이 찬양을 계속해서 들었습니다.

 

바울이 견딜 수 있었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고난과 아픔, 눈물 가운데서 견딜 수 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름아닌 확신이었습니다.

더불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했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도 견딜 수 있었습니다.

 

말씀을 기억하시며 이 찬양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고백합시다.

함께 찬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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