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 목사 설교/수요 및 금요기도회 설교 원고

은혜의 하나님께 돌이키라, 20241204

하엘빠 2024. 12. 4.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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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은혜의 하나님께 돌이키라 날짜 2024124
본문 요엘 11-4 비고 수요예배설교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난 3일동안 평안하셨습니까?

혹여나 세상 가운데서 힘들고 지친 일이 있으셨다면 이 시간 다 내려놓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닫고 위로받으시는 귀한 시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제가 1년에 꼭 한번씩 읽는 책이 있습니다. 바로 천로역정입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주인공 크리스천은 장망성을 떠나

천국으로 가는 구원의 길을 걷습니다.

 

그는 죄와 심판의 무게를 깨닫고, 가족과 이웃의 조롱 속에서도

장망성을 떠날 결단을 내립니다.

 

요엘서의 메시지도 비슷합니다.

남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죄와 심판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함께 살펴보게 될 메뚜기 재앙과 자연 재해는 단지 농작물이 파괴된 사건이 아니라,

죄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심판 가운데에서도 백성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두셨습니다.

 

요엘서와 천로역정 모두,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여정을 이야기합니다.

 

요엘은 선지자입니다. 1절을 보니 그에 관한 짧막한 소개가 등장합니다.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요엘"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 자체가 요엘서의 메시지를 요약합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우상에게 마음을 두었을 때, 심판을 선포합니다.

 

심판은 "여호와가 참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하지만 심판은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심판 중에도 구원을 계획하시며,

회복의 손길로 우리를 부르시는 분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요엘서 전체를 보면, 1장은 이렇게 메뚜기 재앙으로 임한 하나님의 심판을 다룹니다.

그러나 2장은 심판 중에서도 돌이키는 자들에게 주시는 회복의 약속을,

3장은 최종적으로 이루어질 여호와의 날과 구원을 선포합니다.

 

오늘 읽은 요엘서 11-4절은 바로 이 심판의 메시지가 시작되는 부분입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그분의 말씀을 떠났을 때,

메뚜기 재앙은 단순한 자연 재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적 심판으로 임했습니다.

 

하지만 이 심판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기회를 주시기 위한 경고이자 초청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크리스천이 장망성을 떠날 때, 그는 가족과 이웃의 조롱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죄와 심판의 무게를 깨닫고 장망성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요엘서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메뚜기 재앙은 단지 자연재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겪는 위기팬데믹, 경제적 어려움, 건강 문제

이 모든 것들은 단지 삶의 불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고와 초청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기다리시는 신호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어떤 위기가 경고처럼 다가오고 있습니까?

 

이러한 경고를 무시하면 더 큰 심판이 올 것을 성경은 이미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제 곧 살펴볼 메뚜기의 네 단계는 하나님의 경고가 무시될 때 점점 더 심화되는

심판의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신명기에서도 처음에는 농작물 손실에서 시작하여,

결국 질병, 외세 침략, 포로 생활에 이르기까지 점점 심화됩니다.

 

요엘이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분명한 심판이다 그러니 우리들 가운데 더 큰 심판의 재앙이 닥치기 전에

모두가 회개하고 돌아와야 될 것을 백성들에게 선포합니다.

 

지금 남 유다 백성들의 상황은 어떤 상황이기에

선지자는 그들을 향해서 이런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을까요?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잠시 살펴봐야 본문이 더 이해가 잘 될 것입니다.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이 2개로 나눠졌죠.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입니다.

많은 분들이 구약 파노마라를 통해 배우셨을텐데,

남유다의 7대왕 요아스가 시대적 배경입니다.

 

요아스는 어릴 때 죽을뻔 하지만 제사장의 보호로 인해 6년을 숨어 지냅니다.

그러다 왕의 자리에 오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왕위에 오른 요아스는

처음에 정직하게 행했습니다. 성전을 수리하고, 제사를 회복했습니다.

 

하지만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자 그는 돌변합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그가 직접 힘으로 다스리려고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요아스를 돌이키시기 위해 선지자들을 보내 경고하시지만

 

요아스는 듣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경고하는 선지자를,

하나님 말씀이 듣기 싫어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바로 이런 시대적 배경 가운데 요엘서의 말씀이 그들에게 선포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요엘을 부르셨고 그를 통해서 백성들을 다시 회복시키고자 하셨습니다.

 

백성들은 반드시 회복하기 위해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듣지 않으면 그들 가운데 심판이 임합니다. 그 심판이 무엇일까요?

 

요엘서 11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슬프다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

 

요엘서의 핵심은 지금 살펴본것처럼 여호와의 날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심판과 구원의 날입니다.

회개한 자들에게는 소망과 은혜를, 죄악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을 의미합니다.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로 우리에게 두려움을 안겨줍니다.

그러나 이 심판을 우리 대신 감당하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메뚜기 재앙처럼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삼키는 죄와 심판이 십자가에서 멈추었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엘 선지자가 말하는 것을 우리는 마음판에 새겨야 합니다.

우리 역시 귀와 마음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어떤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까요? 내가 원하는 말씀?

우리에게 듣기 좋은 말씀만 들어야 됩니까?

 

우리 역시 이처럼 늘 심판과 회복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 언약백성들 모두가 마음속에

담고 있어야 할 내용들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시는

참된 언약 백성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늙은 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을지어다 땅의 모든 주민들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지어다 너희의 날에나 너희 조상들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요엘 선지자는 "늙은 자들""땅의 모든 주민들"에게 말씀을 들으라고 권고합니다.

여기서 "늙은 자들"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중요한 지도적 역할을 하던 제사장과

장로들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교회로 말하면 목회자, 장로, 교사, 리더들입니다.

 

요엘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지도자는 단지 지시하고 가르치는 사람만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 삶으로 공동체를 이끄는 본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단순히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말씀을 살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리더들의 회개와 말씀 전수는 공동체의 회복과도 직결됩니다.

만약 리더들이 먼저 말씀을 붙들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영적으로 무너질 위험이 있습니다.

 

요아스 왕의 이야기에서 보듯, 지도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날 때

공동체는 우상 숭배와 심판으로 나아갑니다.

 

선지자는 지금 그들을 먼저 부름으로서 모든 백성들이 들어야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땅의 모든 주민들을 부르며 그들 역시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귀를 기울이다는 원어적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아잔이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양쪽 귀를 넓게 잡아서 편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그냥 듣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집중해 귀를 열고 들으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지금 리더들과 모든 사람들이 무엇을 들어야 된다는 것일까요?

하반절에서 말합니다.

 

너희의 날에나 너희 조상들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

지금 어떤 굉장히 큰 일을 당했기 때문에 이런 일을 겪었냐고 물어보는겁니다.

 

당시 유다 백성들이 살던 시대,

그리고 그들의 조상들이 살았던 과거의 시대에도 없었던

엄청난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충격적이기에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말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말하고

그 자녀는 후세에 말할 것이니라

 

지금 닥친 엄청난 재앙을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알릴 수 있도록 말하고 말하라는 거죠

후손들에게 말하라는 것은 이 사건이 절대로 잊혀지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말이 있지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후손들에게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을 기억하게 함으로서,

그들의 시대에 재앙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3절을 자세히 보면 반복되는 단어가 있는데 바로 자녀입니다.

자녀라는 단어가 네 번이나 반복되어 사용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는 단지 부모와 자녀의 관계뿐만 아니라,

교회의 모든 성도가 다음 세대에게 말씀을 전해야 하는 책임을 강조합니다.

 

교회는 함께 말씀을 배우고, 말씀을 나누며,

다음 세대를 위한 믿음의 유산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신명기 6장에서 이 사실을 이미 경험했습니다.

 

쉐마라고 하는 신명기 6장에 등장하는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이 잊혀지지 않도록

마음에 새기고 미간에 새기고

자녀들에게 가르치며 손목에 매고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고 합니다.

 

그만큼 말씀이 전해지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요엘 역시 그들의 역사의 한 부분을 알고 있기에 지금 남유다 백성들에게 이것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재앙이 임했길래 그들은 이렇게 강조하고 있을까요?

 

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요엘서에 등장하는 메뚜기 재앙은 단순히 자연적인 재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드러내는 강력한 상징입니다.

 

본문 4절에서는 "팥중이, 메뚜기, 느치, 황충"이라는 네 가지 메뚜기 종류를 언급하며,

이는 백성들이 가진 모든 것이 완전히 파괴되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메뚜기 떼는 곡식을 먹어치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립니다.

 

밭에서 나는 곡식은 백성들의 주된 생계였고, 포도와 무화과는

부요와 축복을 상징했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경제적 문제만이 아닙니다.

 

메뚜기 재앙은 이스라엘의 영적 위기를 고발하는 사건입니다.

성경은 이 재앙이 신명기 28장에서 경고된 언약적 저주임을 보여줍니다.

신명기 2838-4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네가 많은 종자를 들에 뿌릴지라도 메뚜기가 먹으므로 거둘 것이 적을 것이며

네가 포도원을 심고 가꿀지라도 벌레가 먹으므로 포도를 따지 못하고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며

네 모든 경내에 감람나무가 있을지라도 그 열매가 떨어지므로

그 기름을 네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이는 단순히 농작물의 소실이 아니라,

백성과 하나님의 관계가 깨어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면 이와 같은 유사한 경고가 나타납니다.

 

직장에서의 성공을 위해 예배를 소홀히 하거나,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잊었던 순간이 있지는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이런 삶의 순간을 통해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것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메뚜기 재앙은 예배의 단절을 초래했습니다.

 

메뚜기 재앙은 그 자체로 심판의 도구일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영적 각성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나서야,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기

회를 얻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재앙은 하나님의 경고이자 초청입니다.

 

이어서 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취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울지어다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이는 단 포도주가 너희 입에서 끊어졌음이니

 

선지자는 백성들을 향해 반복하며 선포합니다.

울지어다” “울지어다라고 말입니다.

 

이제는 무엇이 없어졌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통적으로 포도주를 즐기는데 이제는

더 이상 마실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더군다나 시편 104편과 아가서 1장을 보면 포도주의 풍부함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상징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제 그것이 끊어진다고 합니다.

 

내부적으로 식량과 포도주가 끊기는 상황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6-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6 다른 한 민족이 내 땅에 올라왔음이로다 그들은 강하고 수가 많으며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고 그 어금니는 암사자의 어금니 같도다

7 그들이 내 포도나무를 멸하며 내 무화과나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서 버리니 그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었도다

 

이것은 문자적으로는 4절에 나오는 메뚜기떼들을 말하고,

상징적으로는 실제 외세의 침략을 말합니다.

여기서 학자들마다 각기 의견들은 다릅니다.

문자적으로 앞서 살펴보았던 메뚜기떼들을 언급한다고 주장하는 부류가 있고,

두 번째는 앗수르나 타국이 실제 침략한다고 보는 부류들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관점은 상호 배타적이라기보다는 서로 보완적입니다.

메뚜기 떼와 외세의 침략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불순종할 때 자연재해를 일으키실 수도 있고,

외세의 침략을 허락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단순히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임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심판하시기 위해 자연과 역사를 모두 사용하실 수 있는

주권자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튼 성경이 명확하게 이것이라다로 말하지 않아서 할 수는 없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들을 통해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어쨌든 지금 6절에서 말하고 있는것처럼 그들은 그 수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빨은 강합니다.

그래서 7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약속의 땅에 심겨진 포도나무를 완전히 멸합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 껍질을 벗겨 가지를 하얗게 만들어 버리는데

이는 곧 말라죽게 만들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다른 성경에서 상징적으로 이스라엘을 가르킵니다.

그리고 풍성함과 평안함, 그리고 형통을 상징하지요.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이제는 다 파괴됩니다.

 

이렇게 되니 백성들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고통이 얼만큼 클까요? 9절을 읽겠습니다.

소제와 전제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끊어졌고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은 슬퍼하도다

 

심판으로 인해 소제와 전제가 끊어졌습니다.

이는 단순히 제사의 중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는 하나님과 백성들의 가장 중요한 소통의 통로입니다.

이렇게 제사가 끊어졌다는 것은 백성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음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에서 멀어진 상태를 보여줍니다.

백성의 죄와 불순종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심판만 선포하시는 것이 아니라 회복도 동일하게 선포하십니다.

 

요엘서 2:12-13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하나님의 심판은 단지 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요엘 선지자가 전한 심판의 메시지는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그 회복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의 메뚜기 재앙 같은 죄와 절망을 치유하시며,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로 회복시키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메뚜기 떼처럼 소망을 삼키는 일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회복의 길로 나아가십시오.

 

앞서 소개한 크리스천은 긴 여정을 거쳐 십자가에 이릅니다.

그곳에서 그는 죄와 심판의 짐을 내려놓고 새로운 소망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찢고 내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는 우리의 죄를 십자가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십자가에서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회개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인 회복의 약속을 주십니다.

 

메뚜기 떼로 인해 잃어버린 것을 모두 회복시키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유효합니다.

 

크리스천이 십자가에서 짐을 내려놓은 후,

그는 천국의 소망을 품고 기쁨으로 여정을 이어갑니다.

 

요엘서에서도 하나님은 회개한 백성들에게 놀라운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메뚜기 떼가 먹어버린 모든 것을 내가 너희에게 회복시키리니"라는 말씀은

단지 물질적인 회복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은 심판 중에서도 구원의 소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약속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찢고 그분께 돌아가면,

하나님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회복의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삶의 문제와 관계의 깨어짐, 영적 침체 속에서도 하나님은 회복의 손길을 내미시며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 은혜를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결론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요엘서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심판의 경고와 회개의 초청을 살펴보았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합니다.

 

그 날은 모든 죄악이 드러나는 두려운 심판의 날이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신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될까요?

 

첫째, 여호와의 날은 반드시 오기에 엎드려야 합니다.

 

이 날은 우리의 모든 행위와 동기가 하나님의 공의 앞에 낱낱이 드러나는 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기에,

우리가 진정한 회개로 나아갈 때, 그 날은 심판의 날이 아니라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회개는 어떤 한 순간에 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회개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일상생활 가운데서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고

진심으로 십자가 앞에 꿇어 엎드려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를 선택하고 엎드리기 시작한다면

여호와의 날은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의 날, 영광의 날이 될 것입니다.

 

둘째, 겉모습이 아닌 마음을 찢는 진정한 회개로 나가야 합니다.

 

요엘서 2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진정한 회개는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우리는 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십시오.

 

셋째, 회복과 은혜가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요엘서는 심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킨 자들에게는 회복과 축복의 약속이 있습니다.

 

잃어버렸던 곡식과 포도주, 기름이 넘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영이 우리 가운데 부어질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받는 구원과 영생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이런 믿음과 실천으로 나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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