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 목사 설교/수요 및 금요기도회 설교 원고

돌아가자, 열왕기하 22장 8-13절

하엘빠 2023. 8. 17. 14:51
728x90
반응형

3. 돌아가자 (20221221).hwp
0.10MB

 

제목 돌아가자 날짜 20221221
본문 열왕기하 228-13 비고 수요 예배 설교

찬송가 250, 545, 540장 설교후 찬송 546

저희는 지금 지난 2주동안 사도행전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기본기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을 통해서 말씀과 기도가 신앙생활의 기본기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지난주는 12장에서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기도가 큰 능력, 권능임을 깨달았습니다.

 

오늘은 말씀이 왜 이렇게 중요한것인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성경시대와

종교개혁 시대를 동시에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많은 분들이 설교자들을 통해서 성도님들께서 개혁교회’ ‘개혁주의라는 단어를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개혁이라고 하니 특별히 종교개혁이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실 것입니다.

 

개혁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먼저 살펴보면 새롭게 뜯어 고친다입니다. 그러니 종교개혁이라 함은 종교를, 특히 기독교를 새롭게 정의한 사건들을 의미합니다. 잠시 역사속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지난 2017년은 1517년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지 50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물론 루터 이전에도 얀 후스등 여러 개혁자들이 있었지만 표면적으로 가장 크게,

많이 드러난 것, 가장 유명한 시작이 마틴 루터로부터였습니다.

 

루터는 본래 신부였습니다. 신부로서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지만, 당시 로마교회의 심각한 부패를 보고 경험해서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중세 천년을 영적인 암흑기라고 말합니다.

 

당시 로마 교회는 끝없는 미신과 불신앙에 빠져서 참된 교회가 아니라, 가짜교회, 거짓교회가 되었다고 개혁자들은 판단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은 사라지고 교회의 권위와 성직자들의 권위만 끝없이 높아지는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물론 중세의 로마교회도 성도들로 하여금 계속된 신앙의 훈련을 시키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 신앙의 훈련은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 아니라 고행이었습니다.

무릎으로 기어라, 계단을 올라라, 채찍으로 때려라등 잘못된 신앙관을 심어주었습니다.

 

,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얻어지는 칭의를 믿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노력, 업적, 공로를 쌓게끔 했습니다. 오직 믿음과 은혜는 완전히 사라져버렸죠.

 

그리고 신부에게 찾아가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씻어보고자 노력했습니다. 지금보다 더 엄청난

열심히 있었지만, 결국 모두가 잘못되고 허무한 일들이었습니다. 중세 천년간의 역사

자랑하며 그들은 교회가 잘못 이해하고 만들어낸 헛된 전통으로 교인들을 이끌었습니다.

그러니 여기서도 알 수 있는게 있죠. 성도들은 반드시 앞선 리더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셔야 합니다. 특히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나, 혹은 구역장들을 위해 반드시 기도해주셔야 합니다.

바른 믿음으로 성도들을, 구역식구들을 바르게 이끌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종교 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사모함과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을 계속 연구하고 공부하다가 보니, 무지에서 깨어나게 되었죠.

 

그들의 눈을 가리고 있었던 로마 카톨릭의 비늘이 벗겨지게 되면서,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종교 개혁은 성경을 바로 보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동안 교회와 개인이 바르게 보지 못한 성경을 제대로 보는 그런 운동이었습니다.

 

더욱이 당시에는 라틴어로 미사를 진행했는데 성직자 자체가 라틴어를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고, 단 한번도 성경을 보지 못한 사제가 미사를 집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전문적인 지식이나 신학이 필요없이 미사를 집행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굉장히 빈번하게 성직매매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사제만이 아니었습니다. 일반 대중들은 라틴어를 전혀 몰랐기에 그들은 성경 자체를

읽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성당 내부의 온갖 것들이 성도들의 신앙을 고양시키는 시각 자료로 활용했습니다. 성경의 내용들을 그림으로 그리고 형상으로 만든것이죠.

그것이 스테인드 글라스, 성화, 성상입니다.

 

그리고 그려진 각종 무서운 심판의 그림을 보며 면죄부를 사야 되게끔 만들었습니다.

특히 독일의 면죄부 판매 위원장인 요한 테첼은 각종 도시를 돌아다니며 면죄부를 팔았지요.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낸 동전이 헌금함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를 내는 순간 조상들의 영혼은 연옥에서

탈출된다” “미래의 죄까지 용서받을 수 있다그러니 이런 연설을 들은 성도들은 당연히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조상들을 좋은 곳으로 보내기 위해서 면죄부를 샀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성도들은 당연히 신앙생활에 수동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어떤 일이 있었냐면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라고 물으면 성도들은

몰라요 신부님께 물어보세요라고 말하는 웃지 못 할 헤프닝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구원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어요?

교황과 사제들에게 있는 겁니다. 그들이 성도들의 죄를 사해준다고 믿었지요.

 

이렇게 교회와 성직자들이 부패한 가운데서도 굳건히 믿음을 지키고자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타락한 교회를 바라보며 개혁이 필요함을 느꼈고, 그들이 목숨 걸고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그들이 주장한 것이 바로 sola scriptura 오직 성경이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고, 초대교회의 영광과 교회의 회복을 주장했습니다.

이처럼 종교 개혁은 한마디로 성경의 재발견’, ‘성경을 성도들의 손에 쥐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15세기에만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을 보면

성경 시대에도 역시 종교개혁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을 보면 한 명의 왕이 등장하는데, 바로 요시야 왕입니다.

 

솔로몬 사후 나라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이 되었습니다. 역대기와 열왕기를 보면

왕들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죠. 특히 북이스라엘은 선한 왕이 나오지 않고

끊임없이 악한 왕들이 등장합니다.

 

물론 남 유다에도 악한 왕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선한 왕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그중에서도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요시야가 굉장히 선했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뻤으며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그런 왕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런 요시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본문 2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이스라엘이 존경하는 왕 다윗처럼,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것과 비슷하죠.

 

그는 비록 8살이라는 오늘로 치면 초등학교 1학년에 해당하는 나이에 즉위했습니다.

8살에 왕의 자리에 올라서 무려 31년간 통치하면서 여호와 신앙의 회복을 위해서

매우 힘썼습니다.

 

요시야는 왕의 자리에 있으면서 개혁을 주도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열왕기하 말씀과 역대기 말씀을 함께 동시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시야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살펴볼까요? 역대하 343입니다.

아직도 어렸을 때 곧 왕위에 있은 지 팔 년에 그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찾고

제십이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비로소 정결하게 하여 그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제거하여 버리매

 

요시야가 왕위에 있은지 팔 년, 16살이라는 나이에 다윗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우상이 아니라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통치 12년즉. 요시야가 20살 때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결하게 하며

산당들, 아세라 목상들, 각종 우상들을 모조리 없애버렸습니다.

요시야는 모든 우상들을 불태워버리고 빻고 가루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동안 그들의 선조들이 섬기지 않았던 여호와 신앙을 굳건히 하죠.

 

더욱이 더 놀라운 사건이 등장합니다. 역대하 34 14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무리가 여호와의 전에 헌금한 돈을 꺼낼 때에 제사장 힐기야가

모세가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고

 

지금 성전에서 헌금한 돈을 꺼낼 때 무엇을 발견하죠? 율법책을 발견합니다.

지금 율법책을 발견했다는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요시야를 비롯하여 그의 선조들이 지금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죠.

율법이, 말씀이 지금 그들 가운데 없었습니다. 이것이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요시야 이전의 왕 므낫세와 아몬이 우상숭배를 굉장히 많이 했습니다. 특히 므낫세는

우상에게 인신제사를 드렸습니다. 자기의 아들을 불 가운데 지나가게 했습니다.

 

므낫세에 대한 평가가 바로 앞장 왕하 2116절에 나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므낫세가 유다에게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한 것 외에도 또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가득하게 하였더라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으며 엄청난 살육도 벌입니다.

 

그리고 뒤이어 그의 아들 아몬이 즉위합니다. 왕하 2121-22을 제가 읽겠습니다.

21 그의 아버지가 행한 모든 길로 행하여 그의 아버지가 섬기던 우상을 섬겨

그것들에게 경배하고

22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그 길로 행하지 아니하더니

 

그 아들에 그 아버지입니다. 그들이 온 유다 백성으로 하여금 우상숭배를 하게 합니다.

말씀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없습니다.

 

물론 역대하 말씀을 보면 므낫세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 므낫세와 같이 우상숭배를 하다고

쿠데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합니다.

 

이런 혼란과 어려움의 시기 가운데 요시야가 즉위하고 율법책을 발견합니다.

 

요시야는 즉위 18년에 율법책을 발견하고 종교개혁을 일으킵니다. 율법책을 발견하고

요시야가 가장 먼저 했던 행동이 이것입니다. 열왕기하 2211을 보겠습니다.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의 옷을 찢으니라

 

왕의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의 옷을 찢으니라말씀을 듣자마자 옷을 찢습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자신의 조상들이 율법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내리신 진노가 크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열왕기하 233절을 읽겠습니다.

왕이 단 위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께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하매 백성이 다 그 언약을 따르기로 하니라

 

요시야는 모든 백성들 앞에서 언약을 세웁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 라고 하니

백성들의 반응은 우리도 그리 하겠습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요시야에 대한 평가가 2325입니다. 함께 보겠습니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사랑하는 길동교회의 모든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 성도들 각 개개인이 요시야와 같이

개혁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개혁은 다른 것이 아니라 말씀과 기도가 우리 삶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혹시 오뚜기 아십니까? 아이들 장난감이죠. 그런데 오뚜기를 아무리 발로 차고 때리고 밀어도

결국에는 일어납니다. 왜 일어나죠? 그것은 오뚜기 중심에 무거운 추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 가운데, 무거운 말씀의 추가 있으면 우리는 결코 완전히 넘어지지

않습니다. 비 바람이 몰아칠 때 흔들릴지언정 곧바로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시편 3724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현재 코로나19가 많이 완화가 되었다고 하나, 아직은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합니다.

코로나19 시기에 많은 성도들이 힘들어하고 때로는 절망에 빠져있기도 하고, 더러는

교회밖으로 예배의 자리를 떠난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혹여나 그런 성도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회복이 되는 말씀, 그들에게 영적인 개혁을 일으키는 말씀이 필요합니다.

 

유다의 회복은 말씀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설교 서두에 제가 말씀드린 15세기의 종교개혁 역시 말씀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앎으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루터는 로마서 117절 말씀을 보며 이신칭의를 깨달았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인 청교도들은

철저하게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성경을

제외하고 가장 거룩한 사람들이 청교도들이다라는 말이 있을정도입니다.

 

미국의 위대한 설교자 조나단 에드워즈가 1730년대 미국에 영적 대 각성 운동을 일으키게

된 것은 다른 것이 아닌 바로 말씀으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강단에서 선포된 이 말씀은 흡사 폭탄이 터지는것과 같았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며, 회심하여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똑같습니다. 1907년 평양 대 부흥을 기억하십니까?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서 말씀이 선포되어지고 기도할 때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당시 성도들은 이 집회에 참여하기 위해서 때로는 몇 날 몇 일을 걸어서 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들이 설교를 마치고 내려올 때 성도들이 선교사들의 바지를 붙잡으며

제발 설교를 더 해주십시오. 제발 우리에게 말씀을 더 가르쳐 주십시요라고 요청했습니다.

우리가 몇 날 몇 일을 걸어서 왔는데 제발 우리를 위해서 말씀을 더 선포해 주십시요라고

그들은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님들은 옷을 다시 가다듬고 강단에 올라가서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럴 때 놀라운 역사와 회개가 터져나왔습니다.

 

이런 종교개혁, 영적 대 각성 운동의 핵심은 바로 말씀인줄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떻습니까? 개혁자들이 목숨을 걸고 쟁취한 그 종교개혁의 정신과 성경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말씀으로 보지 않습니다. 말씀으로 우리가 새롭게 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우리의 심령을 쪼개며 영혼을 갈아엎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검과 같습니다. 검이라고 하니 감이 오지 않으십니까?

날카로운 수술실의 메스와 같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썩어버리고 상처난 환부를

도려내기 위해서 굉장히 날카로운 메스로 살을 째고 파고 깎지 않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그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사랑하는 길동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게 심겨질지 모릅니다.

 

 

 

요시야가 성전 수리를 하며 헌금함에서 율법책을 발견하고,

허랑방탕한 삶을 살던 어거스틴이 톨레레게 톨레게게라는 음성을 듣고 성경책을 들고

로마서 1313절 말씀을 보고 그가 회심한 것처럼

언제 어느때 누구에게 말씀이 박혀서 그 영혼을 변화시킬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매일같이 성경을 읽으시고, 예배를 통해 말씀을 들으십시오.

또한 여러분들이 은혜받은 구절들이 있다면, 가능한 구역식구들에게 문자를 보내십시오.

누군가는 그 말씀을 통해 회복되어지며, 영혼이 소생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고 옷을 찢은 요시야를 넘어서

요엘 선지자가 말하는 것처럼 옷이 아닌 마음을 찢으십시오.

 

요엘 2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마음을 찢는다는 것은 말씀을 통해서 마음이 뜨거워지며, 이전의 더러운 죄된 모습들을

완전히 벗어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와 말씀앞에 무릎을

꿇는 것을 말합니다.

 

혹시 예수님의 부활이후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를 기억하십니까?

그들에게 말씀이 심겨졌을 때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말씀의 결론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제목이 무엇입니까? 돌아가자입니다. 이는 라틴어로 ad fodtes라고 말합니다.

설교 서두에 말씀드린 솔라 스크립튜라와 같은 종교개혁 당시의 구호입니다.

 

아드 폰테스 근본으로 돌아가자입니다. 근본이 무엇입니까?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서 요시야처럼 옷과 마음을 찢을 때 우리는 다시 회복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살아 움직일 때 우리 길동교회에 부흥과 축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먼저 나의 영혼을 찔러 쪼개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그 말씀을 함께 나누며 전달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찬송가 546장 찬송하고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