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 목사 설교/수요 및 금요기도회 설교 원고

하나님의 간섭하심(룻기 세번째), 룻기 1장 19-22절

하엘빠 2023. 8. 17. 15:01
728x90
반응형

 

 

[서론 ] - 지난 설교 요약

지난 시간에 우리는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나오미와 룻의 모습을 살펴봤습니다.

오르바는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룻은 자신의 신앙을 확실하게 고백합니다. 모압 사람으로서

그모스를 섬기는 것이 아닌 이제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긴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이제 그녀들의 앞에는 어떤 상황이 펼쳐질까요? 나오미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가기만 하면

그들의 삶은 모압에서보다 훨씬 더 좋아질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서론 ] - 쉽지 않은 베들레헴에서의 삶

두 여인은 베들레헴으로 들어갑니다. 모압을 떠나 먼 길을 여행하죠. 그 거리를 따져보면 약 80킬로 정도 됩니다. 지금도 먼 거리죠. 고대근동 당시 두 여인이 여행하기에는 너무 멀고 위험한 거리였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로 인해 그들은 무사히 베들레헴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각기 남편을 잃은 두 여인에게 베들레헴은 결코 마음 편한 장소가 아닐 수 있습니다.

 

약속의 땅을 저버리고 나갔던 엘리멜렉 가정이기에 그들을 향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풍족히 살기 위해서 나갔던 가정이 완전히 망해서 돌아오는 모습을 봤을 때 사람들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들을 바라봤을 겁니다. , 조롱을 당할 수 있다는거죠.

 

더군다나 룻은 나오미보다 훨씬 더 어렵지 않았을까요? 이방여인입니다. 언어와 문화, 생활방식이 완전히 다른 그녀가 낯선 땅으로 들어와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두 여인은 결단했기에 베들레헴 땅으로 들어갑니다.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긴 하지만

남편을 잃은 고부 관계에 놓은 두 여인에게는 사실 베들레헴은 결코 마음이 장소가 아닙니다.

 

이제 그들의 앞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본론 1 ] - 나오미의 현실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이르렀을 때 온 성읍이 소동합니다.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그녀들의 모습을 본 베들레헴 사람들은 떠듭니다. 19절을 보니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라고 나옵니다. 그러니 지금 나오미 자체가 베들레헴에서 이슈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왜 사람들은 이 두 여인을 향해 떠들며 수근거렸을까요?

 

아마도 처음 베들레헴을 떠날때의 모습과 전혀 달랐기 때문일겁니다. 함께 나갔던 엘리멜렉과

두 아들은 보이지 않고 왠 이방여인과 돌아왔으니 말입니다. 더군다나 그들이 가증히 여기는

이방 땅으로 갔는데 거기서 쫄딱 망해서 돌아온것입니다.

 

그래 지들만 잘먹고 잘살려고 하더니 쫄딱 망했네 꼴 좋다~’

것봐라 예전에는 이곳을 버리더니 대체 왜 돌아온거야?’ 라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왜 없었겠습니까?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죠.

냉정하게 말하자면 베들레헴에서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모압땅의 가난과 맞바꾼 상황이 된 겁니다.

재산뿐 아니라 남편과 자식들도 모두 잃어버렸죠. 어디에서 이 일이 벌어졌습니까?

바로 그들이 가증하다 여기는 모압땅에서, 이방인들 가운데서 벌어진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돌아오는 나오미를 볼 때 시끌법석 할 수 밖에 없겠죠. 뭐라고 말합니까?

 

이이가 나오미냐?’ 이 질문은 그들이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녀의 엄청난 변화,

상황에 대한 놀라움의 표현입니다.

감탄사의 일종으로서 그녀를 향한 놀라움과 안타까움의 표현이죠.

 

[본론 2] - 나오미의 상황

그들의 떠드는 소리에 나오미는 대답합니다. 함께 20-2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나오미는 지금 자신의 상황을 설명합니다. 기쁨이었던 자신의 이름을 괴로움, 쓴 이라는 뜻을 가진 마라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나오미는 이 이름을 통해 자신의 처지와 상황을 잘 드러냅니다.

 

흉년이 들어 풍족하게 살기 위해서 나갔지만, 결국 빈손으로 텅빔으로 돌아온 자신의 상황을 말합니다. 지난 첫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고대사회에서 남편과 아들이 없다는 것은 생계유지가 어렵기에 21절에서 말하는것처럼 비어있다는 표현이 딱 맞는 표현입니다.

 

온 성읍이 소동하는 상황가운데 나오미는 자신의 처차한 모습을 그대로 인정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람들에게 보여주죠. 사람들이 이런 말, 저런 말 한다고 해서 감정이 상하거나 싸우거나

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당하게 자신의 잘못, 이렇게 비참하게 되었음을 인정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나오미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그 고통이 피부로, 뼛속까지 느껴지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나오미는 자신이 당한 이 모든 고통의 이유를 하나님께 돌리고 있습니다.

20절 하반절에서 전능자가 심히 나를 괴롭게 하셨다

21절 중하반절에서도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를 20절 하반절에서 말하는것처럼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다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왜 이 모든 원인을 하나님께로 돌리고 있을까요? 나오미가 말하고 있는 이 상황, 그녀의 늬앙스를 잘 살펴봐야 그녀가 말하는 원래 의미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 고통스러운 삶의 형편이 다름아닌 하나님의 징계때문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어떤 일로 인해서 징계를 받았다고 말합니까? 바로 약속의 땅, 베들레헴을 떠났기 때문에 나오미가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전의 나오미는 죽었고,

이제는 슬픔과 고통이 가득한 마라만 남았다는겁니다

 

고난의 쓴 맛을 본후 나오미가 경험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의 마음과 더불어

실제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너무 고통스러운 심정을 고백하는겁니다.

 

여기 나오미의 말에서 한가지 안타까운 것이 있습니다. 나오미는 기쁨이라는 뜻 대신에

마라라는 이름으로 부르라고 합니다. 이는 괴로움, 고통이라는 의미죠. 그런데 이미 나오미는

자신의 조상들의 역사를 통해 마라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지 않았을까요?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고 사흘을 걷습니다. 그리고 목이 말랐으나 물을 얻지 못합니다.

그리고 한 장소에 이르러 물을 발견하고 마셨는데 그 물이 매우 씁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뭐라고 지었죠? ‘마라라고 지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불평하고 불만을 터트리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나무를 던지니 물이 달게 변해서 마시게 되었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상황과 환경과 여건을 보며 자신의 이름을 마라라고 부르지 말았어야 합니다.

쓴 물을 단물로 바꿔주신 하나님을 기억했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이 놀라운 것은 마라를 지나 조금 지나보니 엘림이 등장합니다.

엘림은 쉽게 말해 오아시스입니다.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그루가 있는 생명샘입니다.

 

나오미와 우리의 인생 역시 이렇습니다. 지금 당장은 답이 없어 보이는 상황, 어려운 상황이지만

눈 앞에 보이는것에만 매여있으면 안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쓴물을 단물로 바꾸시는,

마라를 나오미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가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나오미는 지금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온 것 아닙니까?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왔는데 어찌 진짜로 텅 비어있겠냐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는 백성은 결코 비어있지 않습니다.

지금은 빈것처럼 보여도 은혜로 가득채워질 줄 믿습니다.

지금 나오미는 그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마라라고 부르라는 거죠,

그런데 지금 나오미는 자신의 상황에 매여 한 사람을 놓치고 있습니다.

나오미뿐 아니라 베들레헴 성읍 사람들도 잊고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입니다. 두 명의 여인이 베들레헴에 돌아올 때 성읍 사람들은 이이가 나오미냐?’라고

묻기만 했지, 옆에 있던 룻을 물어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오미 역시 21절에서 사람들에게 말하길 비어 돌아오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자신과 함께 목숨을 걸고 베들레헴으로 들어온

룻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니 엄청난 신앙고백을 하면서까지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룻인데 왜 언급하지 않았을까요?

어떤 성경학자들은 이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룻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왜냐면 젊은 여인이고, 또한 이방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 그녀가 할 수 있는게 무엇이 있겠냐는 겁니다. 그래서 나오미도 베들레헴 성읍 사람들도 룻을 못 본척 하고, 룻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았던게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 룻을 통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본론 3] - 간섭하시는 하나님

2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성경은 두명의 여인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시기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언제입니까? 바로 보리 추수를 시작할 때입니다.

추수를 한다는 것은 수확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는 것이죠. 비어있는 창고가 가득차게 되는겁니다. 이것은 16절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께서 베들레헴을 기억하시고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음을 알고 있죠.

 

그런데 이 상황이 나오미와 룻에게는 무조건 좋은 것일까요? 인간적은 눈으로 본다면

이 두 명의 여인에게는 오히려 더 어렵고 힘들게 느껴졌을 수 있습니다.

 

왜냐면 당시 풍습으로는 추수때는 축제나 다름없습니다. 사람들을 불러서 함께 풍성히 나누며

그 수확한 것으로 인해 매우 기뻐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즐거움으로 추수할 때 나오미와 룻은 수확할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땅도 없고, 일하지도 않았고, 가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과연 나오미와 룻에게 보리 추수때는 기회일까요? 아니면 더 고통스러운 시기일까요?

 

방금 살펴본것처럼 우리가 인간적인 눈으로 봤을때는 희망과 소망이 없습니다.

왜냐면 나오미나 룻은 단 하루도 먹을 것이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간섭하시는 하나님은 그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간섭하셔서

먹을 것이 있을만한 환경을 만들어주셨습니다.

 

만약 이들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는데 계속 흉년이라면 어땠을까요? 물론 흉년이었다면 돌아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습니다만.. 한번 생각해봅시다., 성읍 주민들 자체가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녀들은 일자리를 구하지도 못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주민들이 그녀들에게 먹을 것을 충분히 나눠줄 수 있을까요? 늙은 나오미와 이방 여인이 먹을 것이나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까요?

속된 말로 구걸해서 먹거나 아니면 훔쳐먹을 수 밖에 없을겁니다.

 

이 상황을 이제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살펴봅시다.

우리 하나님은 놀랍게도 보리 추수 시기에 맞춰 그녀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이것은 나오미와 룻 같은 과부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받는 시기입니다. 왜냐면 지금 모압에서 나오미는 이 시기를 생각하고 돌아온게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돌보시고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만 듣고 돌아온겁니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됩니까? 나오미조차 인정하지 않고, 성읍 사람들의 눈에도 보이지 않았던

룻을 통해 역사가 일어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겠지만

친족 보아스의 밭에서 일할 수 있게 되고, 그로 인해 나오미와 룻은 먹고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더욱이 보아스와 룻이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나오미는 이 모든 것을 생각하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하나씩 성취하셨습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때와 시기를 맞춰 모든 것을 이뤄가고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론 1]

오늘 말씀의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은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두명의 여인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봤을 때 그들은 희망이 없었습니다.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비웃기도 하고 스스로 고통, 괴로움이란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이들도 모르게 하나님께서 간섭하고 계셨습니다.

이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난다고 생각하고 있을때도 하나님은 이들과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시편 846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때에 그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주나이다.

 

그리고 포로기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죠.

예레미야 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우리 길동교회의 성도 여러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언제나 선하신줄 믿습니다.

 

지금 본문에 나오는것처럼 때로는 고통 가운데 있고, 눈물과 어려움 가운데 계신분이 있습니까?

좌절하지 마십시오. 나오미처럼 너무 큰 고통에 빠지지 마십시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가, 하나님의 손길이 여러분들의 삶을 주장하고 계십니다.

 

며칠전 새벽 설교때 에스더 관련 설교를 하며 이렇게 말씀드렸죠.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선한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

 

이것을 기억하시고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선하신 하나님만 믿고 따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오직 믿음으로 주기도문

 

 

728x90
반응형